노숙 / 윤석산
2015-07-28 (화) 12:00:00
조이스 리 ‘천국과 지구사이’
종각을 베고 하루 종일 잠만 청하신다.
보신각 종소리 덩그렁, 덩그렁
머릿속을 굴러다녀도
도저히 기침하려 하지 않는 삶
머리맡, 부산히 지나고 지나는 만백성,
그들 향해 엄중히 선포해야 할 교서
오늘도 펴지 못한 채
온통
크고 무거운 가방 속 구겨 담겨져
그의 곁 덩그마니 놓여 있다.
깨고 싶을 때 깨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래서 이루는 아, 아 천 년, 만 년의 제국
오늘도 대낮 환한 꿈속 유유히 거니시는
무소불위의 제왕이시여!
/ 윤석산(1947- ) ‘노숙’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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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옆에 놓인 보따리 속에 만백성에게 선포할 교서가 들어있다니, 놀라운 생각이다. 저들의 때 묻은 가방 속에 세상의 비밀과 진상이, 그리고 나아가야 할 길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다. 깨고 싶을 때 깨고, 자고 싶을 때 자는, 더 이상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을 보라. 대낮에도 환한 꿈속을 유유히 거니시는 이분들이 무소불위의 대왕. 그런데 이들의 보따리가 열리고 만천하에 비밀교서가 선포될 날이 언젠가 올까? 그것이 문제이다.
<임혜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