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라고 고개를 기우뚱하는 독자들이 많으시리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필자는 세상을 뒤엎을만한 진짜산업혁명은 모두 미국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들어온 미국은 항상 민주, 문화, 대도시, 선진공업 등등 부러운 형용사들을 써서 불러줘야 옳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불과 200여 년 전인 1820여년대의 미국은 부분적 독재, 정치적 부패, 가난하고 미개발된 농업국가였다. 미국사람들은 영국을 최선진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식민지 미국에 사는 영국인들에게 영국국민으로서의 의무만 요구하고 권리는 주지 않는 모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미국의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사람들이 개화 초기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양물품 들을 ‘배를 타고 건너왔다’는 의미인 ‘하꾸라이’라고 부르면서 무조건 숭상하였듯이 미국사람들도 영국, 불란서 등의 나라에서 수입했던 물건들을 선호하였으며 가난한 사람들까지 많은 생활필수품들을 유럽에서 수입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수입관세율은 항상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되었었으며 미국의모든 항구도시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컸던 건물은 Custom House라고 불리든 관세국 건물이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그전까지 작은 땅덩어리에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식량이 모자라고 사냥은 귀족들의 전유물로써 일반국민들은 들짐승조차 잡아먹을 수 없는 아사지경에서 공업의 개발로 농장을 떠난 농민들이 공장노동자로써 굶어죽는 것은 면하는 혁명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사를 면하게 된 이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산업혁명은 후일 공산주의자들이 신랄하게 비판하는 ‘노동착취/자본주의’ 제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산업혁명후의 런던은 원래 날씨가 좋지 않은 곳이기도 하지만 동력을 얻기 위해 마구 써댄 석탄의 매연으로 공기오염이 극심하였으며 템스 강은 오물처리장과 같았다고 하며 시내에 가득한 빈민들의 도덕과 생활수준은 극악하였다. 산업기술의 국외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계나 공장의 설계도등의 반출을 국가가 금지하였으며 기술비밀의 보존을 위해 회사 간의 전직조차 규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산업기밀의 유출방지가 완전하거나 영구적일수가 없었다. 더구나 무슨 방법으로든지 기술정보만 빼내오면 한몫 톡톡히 할 수 있는 ‘기회의 나라’가 바다건너에 있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영국의 당시 최신 방직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Samuel Slater라는 사람은 엄청나게 머리가 좋았던 사람이었던 모양으로 그 공장의 모든 시설을 머리에 암기하였다. 미국에 건너온 그는 두 사람의 투자자들을 구해서 로드아일랜드 주에 영국 것과 똑같은 최신 방직공장을 1792년에 세우고 어린아이들 아홉 명으로 미국 최초의 방직공장을 시작하였다.
보스턴에의 무역상 Henry Cabot Lowell 이란 사람은 1810년과 1812년에 영국의 방직공장들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812년에는 미영전쟁이 시작되었던 탓에 무역을 할 수 없게 된 Lowell은 영국식 방직공장 설립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연구와 연구 끝에 그는 보스턴의 몇 공장주들과 합자하여 매사추세츠 주의 Waltham이란 곳에 재료에서 시작하여 옷감까지 만드는 전 과정을 처리하는 방직공장을 1813년에 설립하였다. 이 방직공장은 아주 성공적이어서 1822년에 딴 곳의 강 옆에 아주 큰 공장을 짓고 도시이름도 Lowell이 라고 명명하였다.
이 공장이 또 크게 성공하자 매사추세츠 주뿐만 아니라 메인, 뉴햄프셔 주 등에서도 방직공장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매사추세츠, 로드아일랜드, 커네티컷 주 등에 많은 방직공장들이 집중해 있었다. 옷감들을 최초로 미국 내에서 생산했었다는 이유 이외에도 이때에 이 지역에서 방직공장들이 성공한 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큰 마력의 동력을 얻어 대규모의 공장을 가동할 수가 있었지만 증기기관을 움직이는 수증기를 만들기 위해 많은 량의 석탄을 태웠어야 했다. 석탄 값이 많이 드는 것도 문제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공기오염이었다. 좁은 도시 안에 설치된 많은 공장에서 무제한으로 쏟아내는 검은 석탄연기를 상상해보면 당시 런던의 공기가 얼마나 오염되어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공장들은 폐수를 여과 없이 하수도로 내쏟았으니 템스 강의 오염도 말할 수 없었다.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역은 넓은 평야들이 별로 없고 땅에 돌이 많은 박토로써 농업이 발달할 수가 없는 곳이다. 작은 산들과 물이 흐르는 계곡과 강들이 많아 “쓸모없는” 지역으로 생각되기 쉬운 지역이다. 하천의 경사도 심해서 물의 낙차가 크고 물살까지 센 지역 들이 많았다.
요즈음 같은 과학적 눈으로 보면 소형 수력발전기들을 설치해두면 좋았을 지형이지만 그때에는 아직 전기도 발명되기 전이었었다. 물레방아 돌리는 데나 쓰기에 적합한 지역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Lowell의 방직공장들은 물레방아를 공장의 동력으로 썼다. 일 년 내내 빠르게 흐르는 하천의 수력을 공짜로 썼다. 이 동력은 공짜일 뿐만 아니라 공기 오염이 전혀 없는 자연 재생산 동력이었다. What more do you want? 공장이 모두 하천가에 세워졌음으로 자연경치도 좋았고 공기는 더욱 좋았다. 영국에서 온 방직공장 시찰 자들이 모두 놀라 자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선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공 요인은 노동력이었다. 옛날 우리의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이 풀 먹인 모시옷 입고 정자나무 아래에서 신선처럼 마시던 약주를 빚는 일에서 베 짜고 한복까지 손수 짓느라고 하루에 서른 시간이 있더라도 모자라는 고생들을 하였던 것처럼 초기의 미국사람들도 거의 모든 연장들과 생활필수품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어서 썼어야 했던 까닭에 하루에 서른다섯 시간도 모자라는 고달픈 생활을 했어야 했고 주업인 농사일에는 항상 일손이모자라서 일곱 살이 넘은 아이들은 부모를 도와서 한몫들을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농사일과 집에서 쓰는 도구들과 생활필수품들이 공장에서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농촌생활이 쉬워졌을 뿐만 아니라 유휴노동력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미국여성들은 투표권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집안 밖에서는 임금을 받고 일할 기술도 장소도 없었다. 마침 이런 변환기에 방직공장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방직공장은 노동집약적인 것으로 여성적인 섬세함은 필요하였으나 고도의 기술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성들에게 안성맞춤의 직장이었다. 방직공장주
입장에서도 여성은 안성맞춤의 일꾼들이었다. 남자들보다 일반적으로 더 고분고분하고 무엇보다 임금을 훨씬 덜 주어도 되었던 것이다.
방직공장들이 처음에는 미혼 아가씨들을 쓰기 시작하다가 곧 기혼 여성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까지 썼으며 나중에는 남자들까지 포함된 전 가족들이 와서 공장에서 일하고 가족단위의 생활들을 하면서 공장 타운에서 살았다. Lowell은 종업원복지에도 배려를 하여 종업원 기숙사를 지었고 타운 중심지에는 교회, 도서관, 공회당 등을 회사에서 지었다고 한다. 역시 영국에서 온 시찰자들이 미국 방직공장들의 직원 처우와 생활환경을 보고 감탄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모든 공장주들이 종업원복지에 똑같이 배려했던 것은 아니고 노동환경이 아주 열악한 곳들도 있어서 더러 남부 노예주의자들은 “우리는 최소한 노예들을 잘 먹이고 입히고 재워주고 노후에도 죽을 때까지 돌보아 주지만 북부 공장주들은 ‘공장노예’들을 착취하다가 늙고 병들면 헌신짝처럼 버린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장노예들은 싫으면 아무 때고 사직을 할 수가 있었고 돈을 조금 모으면 서부로 이주해서 땅을 사서 어엿한 농장주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방직공장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폐병 등 직업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는 등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노동착취의 일례라고 미국의 사회개혁주의자들로부터 심각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