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붉은 장미, 달콤한 초콜릿 그리고 두부

2015-01-31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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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청원 / 내과전문의

해마다 밸런타인데이가 오면 화원과 초콜릿 가게가 바빠진다. 사랑의 상징을 파는 곳이다. 붉은 장미는 용솟음치는 열정의 상징이긴 하지만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초콜릿은 ‘사랑의 묘약’으로 불린다. 감미롭고 포근한 사랑의 감정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초콜릿에는 ‘페닐에틸아민’이라는 뇌세포 흥분 화학물질이 들어 있다. 이 성분이 사랑의 감정을 일으킨다는 주장이지만 이 화학물질은 복용 후 10-20분 내에 체내에서 분해되어 소멸해 버리며 뇌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의사인 나에게서 초콜릿 성능에 대한 믿음도 이렇게 없어져 버렸다.

붉은 하트가 그려진 카드에 애틋한 사랑의 문장을 정성들여 써서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 일을 해본 지도 오래다. 요즘엔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방안 컴퓨터 앞에서 이메일로 순식간에 자판이나 두드리니 무슨 아늑한 사랑의 감정이 솟아날 수 있을까 의아심이 든다. 생활환경의 변화로 차분하며 감미롭고 애틋했던 낭만적인 시간들은 사라져 버렸다. 삭막해진 기계문명 사회의 산물이다.

붉은 장미는 언젠가는 시들어 버리겠지만 시들지 않는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 사랑이 싹튼 후 첫 2년(결혼생활도 마찬가지다)은 매혹과 황홀의 기간이다. 뇌에서 철철 넘쳐흐르는 페닐에틸아민이 삶에 생기를 준다. 들판에 만발한 꽃도 나를 위하여 눈부시게 화려한 색깔들의 합창으로 축제를 펼쳐주고 있는 것 같고, 그와 나는 밤이 지새도록 같이 대화를 나누어도 졸립지도, 피곤하지도 않다. 창을 뚫고 아침 침상으로 쏟아져 들어와 눈을 찌르는 눈부신 햇살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마냥 같이 누어있고 싶은 그런 기간이다. 모든 것에 생동감이 주어진다. 이것이 기원전 플라톤이 말한 “사랑의 광기”일 것이다.

이 매혹과 황홀의 첫 2년은 페닐에틸아민의 감소로 서서히 사라진다. 다음 2년은 안정 속에 평안과 유착의 기간이다. 이때 엔돌핀이라는 호르몬의 분비가 증가되면서 사랑의 아늑하고 포근한 감정이 유지된다.

이렇게 4년의 기간이 지나면 엔돌핀 감소가 시작된다. 남자는 소멸해가는 사랑의 감정을 또 다른 자극으로 되찾으려 여기 저기 기웃거리게 된다. 여자의 경우 임신과 출산, 수유 등의 과정을 통해 뇌에서 분비되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으로 인해 모성애라는 따듯한 사랑의 감정이 남자보다 3-4년 더 길게 지속되어 가정의 안정을 유지한다.

사랑의 과정 7년이 흐른 후에는 여자도 바깥세상에 눈을 돌리게 된다. 사랑(결혼) 5년째엔 남자가 곁눈질을 하며, 7년째엔 여자가 구두를 벗어 들고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하게 된다고 한다. 마릴린 먼로 주연의 옛 영화 ‘7년만의 외출’이 이런 내용이다. 새로운 플라톤식 광기인 사랑의 추구다. 이 현상자체가 결국은 감정의 퇴색으로 우리들 삶의 허탈감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해결 방안이 있다. 통상적인 사랑이 싹트기 전 첫 시작을 플라톤이 말한 ‘사랑의 광기’가 아닌 친구로서, 동반자로서의 관계로 출발하는 것이다. 한 시인은 “사랑은 붉은 정열의 장미꽃이 아니라 함께 핀 안개꽃”이라고 했다. 사랑의 감정요소인 매혹, 황홀, 성적 호감으로 가 아니라 비올 때 같이 비 맞아주고 힘들어 할 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며 슬플 때는 함께 울어 주는 우정의 동반자가 된 후 차근차근 사랑의 여정을 쌓아 간다면 한 층 더 오래가는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표현 못한 쌓인 말들을 정답게 들려주는 대화의 창을 열고 밸런타인데이를 맞이하는 것이 초콜릿 한 상자보다 더 값진 선물이 될 수 있다. “말을 잘하면 비지 사러 갔던 사람이 두부 사들고 온다”는 옛말도 있다. 식탁에 두부가 놓여 지도록 대화의 창문을 열자. 그 창으로 초콜릿과 장미의 맛과 향기도 함께 흘러들어 오는 밸런타인데이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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