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민112주년 특별 연재]사진신부 천연희 이야기 (7)

2015-01-29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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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1929년에 딸 루스(Ruth) 영순을 낳았는데, 이때부터 박대성은 해리와 루트만 차별하여 사랑했다. 그뿐 아니라 애들 옷도 사지 못하게 하는 등 괴팍한 성격을 드러냈다. 1930년도 경 개학이 가까워 애들 옷과 신발을 사왔을 때, 박대성이가 1 주일을 두고 시비를 하였다. 이때는 천연희도 너무 화가 나서 옷과 신발을 다 태워버렸다. 애들 교육을 시켜주겠다고 했었는데 매리가 대학에 가려고 했을 때 못 가게 야단을 치기도 하였다. 매리가 하와이대학교에 다니면서 한인학생회 회장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한인 학생 장학기금 모집 등으로 활동이 끝나고 집에 늦게 오면, 박대성이가 야단을 치고 난리를 부렸다. 어느 날 매리가 또 늦어졌는데, 집에 못 들어오게 야단을 쳐서 천연희가 매리를 형님 같은 친구 김순필의 집에 머물게 하였다. 일주일 후에 매리를 집에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박대성이가 화를 내며 반대를 하면서, 매리가 집에 오면 자기가 나간다고 협박을 하였다. 매리가 집에 온 날 박대성이는 정말 짐을 싸들고 나갔다. 결국, 천연희는 1939년 2월 8일에 박대성과 이혼 하였다. 그 동안에 큰 딸 순애는 고등학교 졸업 후 17살에 교통사고로 죽었고 (1933), 애들라인은 집 2층에서 떨어져 (1929) 코뼈를 다쳐 몇 번에 걸쳐 수술도 했다. 박대성은 혼자 살다가 1947년경에 사망하였다. 천연희는 1941년 6월 30일에 미 육군 공병단의 기븐(Robert Anderson Given)과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기븐도 세 번째 결혼하는 것이었다. 천연희는 기븐을 ‘참 사랑했고 존경하였다.’ ‘육대륙 오대양 오색인종 중에 사랑으로 맺은 인연은 칼라 (collar)를 잊어버리고 정의와 인도로 살아간다. 이 영감이 좋은 영감이다. 내가 데리고 온 자식 4 남매를 자기 자식같이 대우하고 도덕적으로 길러 주었다. 그 장한 성격을 생각해서 나도 자기에게 할 수 있는 대로 잘 하고자 하였다.’ 기븐은 1964년 여름에 병원에 입원했다가 집에 돌아오지 못 하고 두 달 후 10월 19일에 사망하였다.

천연희의 딸 매리가 현재 (2014) 95세인데, 세 아버지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억하고 있다. “길찬록은 항상 술을 마셔서 무서웠고,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박대성이는 성격이 아주 나빴고 언제나 소리 지르고 어머니와 싸움만 하였다. 기븐은 참 좋은 사람이었고 어머니가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천연희는 길찬록과 이혼을 했어도 그를 애들 아버지로 대접하였다. ‘마음은 좋은데, 자기가 마땅히 할 일도 모르고, 집안 살림을 위한 예산도 세울 줄 모르는’ 무책임 때문에 이혼한 것이었다. 1935년 매리가 중앙중학교(Central Intermediate School)를 졸업할 때 아버지와 기념으로 사진을 찍으라고 해서, 아버지와 오빠 데이비드와 함께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당시에 사진기가 있는 집이 별로 없어서 지금과 같이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없었지만, 천연희와 길찬록이 같이 찍은 사진은 없다.


데이비드는 한인기독학원 (8학년)을 졸업하고 맥킨리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아버지 길찬록과 함께 윌헬미나 라이즈 (Wilhelmina Rise) 언덕 집 셋방에서 살았다. 천연희는 시시때때로 매리에게 아버지를 찾아가 보라고 했고, 매리는 학교 후에 가파른 언덕을 걸어서 아버지를 방문하느라 싫었던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천연희가 카네이션 농장을 할 때에는 (1941-1964) 아들을 위해서인지 길찬록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농장 안에 조그만 집을 짓고 아들 데이비드와 길찬록이 들어와 살도록 하였다. 길찬록과 함께 살던 데이비드는 결혼 후에도 아버지를 계속 모셨는데, 며느리도 시아버지를 잘 봉양하였다. 어느 날 길찬록이 감리교회 안창호 부목사에게 ‘며느리가 나를 공경하는 것이 감개무량한데, 고마운 말을 하고 싶어도 영어로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안 목사가 내 며느리에게 말을 좀 해 주시오.’ 라고 부탁했다. 길찬록은 또한 천연희에게 전해 달라고 다음과 같은 말도 남기었다. ‘나의 부인되던 이가 나를 버리고 간 것은 모두가 나의 잘못으로 그리 되었다. 나이 많은 내가 남의 청춘을 데려다가 건사를 못 했으니, 나의 잘못이다. 그래도 그 부인으로 하여금 이런 좋은 아들이 생겨서 내가 행복하다. 그 분이 고맙다.’ 1954년에 85세로 사망한 길찬록의 장례식 후에 손님 접대를 했을 때 천연희의 릴리하 한인기독교회 친목회원들과 천연희의 남편 기븐이 모든 준비를 해주었다. 필자가 천연희를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1995년 한인양로원에 살고 계실 때였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내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세 번 한 것이 아니야!”라고 한 말씀에서 그가 일종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생계를 책임지지 못한 알코홀릭 첫 남편과 이혼했을 때는 ‘일부종사’ 관념을 지키지 못했다는 후회, 모진 성격의 두 번째 남편과의 이혼에는 “아이구 내 팔자야” 라는 한탄, 그리고 정말 존경하고 사랑한 세 번째 백인 남편과의 결혼으로 ‘수군거림’ 내지는 이른바 왕따를 당하면서 느꼈던 분노 (이에 관하여는 이 글에 포함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사진신부 천연희가 가졌던 콤플렉스였다. 대부분의 사진신부들이 두 번 결혼한 것은 흔한 일이었는데, 남편과의 나이 차이와 한인 사회에 부인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 번 그리고 백인과의 결혼은 흔치 않았다.

<계속><사진설명: 길찬록, 데이비드, 매리가 함께 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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