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민112주년 특별 연재]사진신부 천연희 이야기 (5)

2015-01-23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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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

길찬록(吉燦祿 1869-1954)은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1905년 6월 20일에 만 36세로 혼자 하와이에 왔다. (2014년 7월 15일에 필자가 천연희의 딸 Mary Khil Zarbaugh 에게서 아버지 길찬록의 유품을 받았는데, 그 중에 길찬록의 딸과 사위, 외손자 등에게서 온 편지가 있었다. 딸이 1941년 3월 25일에 쓴 글에 이별한지 38년이나 되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길찬록이 하와이에 오기 2년 전에 집을 떠났음을 알 수 있다.) 천연희를 데리러 이민국에 온 길찬록은 ‘시커먼 얼굴에 술을 먹어 벌겋고, 옷은 빨지도 않은 꾸글꾸글한 것’을 입고 있었다. 천연희는 길찬록의 첫 인상을 ‘옷 꼬라지하고! 도대체 내가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내 마음에 부끄러웠다. 아이고! 우리 집 머슴도 저보다는 나았는데!’ 라고 기억하였다. 길찬록은 천연희보다 27살 더 많았다. 이민국에서 나와 마차를 타고 킹 스트리트 뒤편에 있는 해동여관 (941 River Street)으로 갔다. 가와이[카우아이 섬)로 가는 탁하순과 하와이 섬으로 가는 이시남도 해동여관에 들었다. 여관방에 들어가서 통곡하고 있는데, 해동여관 주인 정윤필의 어머니가 ‘사진혼인 남편들은 다 나이가 많다’면서 위로해 주었다. 혼인을 하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려보낸다니 그것도 창피한 일이라 혼인은 해야 했지만, 길찬록이 방에 들어올까 무서워 문을 잠그고 울면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친구들과 와이키키 구경을 하고 돌아오니 여관 주인 어머니가 다음 날 (6월 29일) 기숙사 [한인중앙학교]에서 목사가 혼인을 해 준다고 알려 주었다. 할 수 없이 다음날 길찬록과 함께 (다른 기록에는 탁하순, 이시남과 갔다고 되어있다.) 마차를 타고 이승만 씨가 운영하는 학교로 갔다. 그 곳에 있는 교회 (현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에서 홍 [홍한식] 목사가 남자 세 사람과 여자 세 사람 (천연희, 탁하순, 이시남)을 세워 놓고 혼인식을 해 주었다. 교회 아주머니들이 망사 (면사포)를 얻어다가 씌워 주었다. 탁하순과 이시남은 신랑이 사준 구두를 신었는데, 길찬록은 구두를 사주지 않아서 (못해서) 교회 아주머니가 어디서 얻어다 주었다. (후에 한 아주머니가 사 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천연희는 “대한복 (한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사랑 없는 혼인”을 억지로 하였다. 가락지는 받았는데, 나중에 박금우가 빌려준 반지였음을 알게 되었을 때 기가 막혔다.) 물론 사진은 찍지 않았다 (못했다). 다음날 배를 타고 마우이 섬 파이아농장의 캠프 원(Camp 1) 으로 갔다. 당시 농장의 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을 번호로 불렀고, 마을 안에 각 나라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한인 캠프, 일본인 캠프, 폴투갈 캠프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 곳에 박금우가 살면서 한글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할 여자가 들어올 때가 되면 십장(什長) 에게 말을 하여 집을 얻어 놓는데, 길찬록이는 집도 마련해 놓지 못했기 때문에 중매자 박금우 집에서 1 주일 머물면서 대접을 잘 받았다. 그 후에는 푸우네네(Puunene)에 사는 김익서의 집으로 가서 한 달이나 머물렀다. 김익서의 부인 천 엘리사벳은 서울에서 왔는데, 같은 천씨로 천연희를 친 동생처럼 사랑해 주었고, 길찬록이 나이가 너무 많다고 동정도 해 주었다. 그 후에 키카니아 (Kikania ?)에 집이 마련되었다. ‘학생 때 남자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처녀로 하와이 사진 혼인 들어와서 그 깨끗한 정조를 늙은이 노동자에게 받쳤다. 그리고 아무 사랑 없는 세상을 보냈다. 그리하는 순간에 천년적 하나님이 주신 여자의 책임을 하느라고 하와이에 온지 석 달 만에 아기가 섰다.’ 먹고 싶은 과일 등 음식을 살 돈도 없었다. 남편이 ‘알콜릭 술쟁이’ (alcoholic) 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여 제대로 일을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당이 75전이었고 한 달에 20일을 일해야 $15를 벌 수 있었는데 길찬록은 그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 길찬록의 농장 ‘방고’ (번호番號의 일본 발음)는 264였는데, 신용이 없어 농장 가게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살 수도 없었다. 이 번호는 노동자의 이른바 ID 번호였고, 이름 대신 사용하였다. 당시 농장 상점은 현찰제가 아니고, 노동자의 번호 밑에 물건 가져간 것을 기록하였다가 월급날에 그 달의 외상을 갚는 외상제도였다. ‘꽃다운 청춘시절 부모형제 이별하고 만리타국 미국 영지 하와이에서 연애도 금전도 다 허공에 실패로’ 매일 울고 있는 천연희에게 동네 아주머니들이 음식도 갖다 주고 도와주었다. 할 수 없이 천연희는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는 노동자들의 작업복을 빨아 돈을 마련하여 임신 중에 먹고 싶은 식품들을 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빨래를 할 줄 몰라 쩔쩔매었는데 아주머니들이 가르쳐 주었다. 한 달 동안 5명의 빨래를 계속 맡아 빨아주면 $6.50을 벌었다. 빨래뿐만 아니라, 아주머니들에게서 노동복 바지 만드는 방법을 배워 만들었고, 일본 사람의 ‘다비’도 만들어 팔았다. 마우이에서 7년을 사는 동안 큰 딸 Betty 순애(順愛, 1916년), 아들 David 은주(恩主, 1917년), 둘 째 딸 Mary 순복(順福, 1919년)을 낳았다. 제대로 농장에 나가서 일을 하지 못하는 길찬록을 대신하여 천연희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여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사진 위 방고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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