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암흑 깨고 문예부흥 시작한 피렌체… 곳곳 건축·예술품 즐비

2015-01-0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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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렌체공화국 실질적 지배 메디치家, 예술가들 후원해 새로운 시대 열어

▶ 정치·경제 중심지였던 시뇨리아 광장엔 정부 청사로 쓰였던 화려한 베키오궁

[르네상스, 문명의 부활]

자그마한 반도국 이탈리아가 유럽과 세계에 영향을 미친 시대와 사상은 크게 세 번이다. 시대순으로 보면 첫째가 고대 로마제국이고 두 번째는 14~15세기 르네상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세기 초 파시즘이다. 르네상스를 통해 다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중세라는 ‘암흑시대’를 뚫고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면 왜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르네상스가 시작됐을까. 이는 르네상스가 깨려고 했던 억압적 중세 기독교 체제의 무게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무거웠기 때문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고 이탈리아어로는 ‘리나센차’ (rinascenza) ‘리나시멘토’ (rinascimento)라고 부른다. ‘부흥’은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다. 보다 인간적이었던 고대그리스·로마문명을 다시 불러냈다는 의미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예술가들은 중세기독교의 대표인 로마교황과 대립하면서 새로운 사상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하는 근대 유럽문명으로 나아가게 된다.



▧ 르네상스를 후원한 메디치

이탈리아의 피렌체공화국, 특히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를 이해하려면 ‘팔라초메디치’(메디치궁)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메디치가(家)는 피렌체공화국 최고의 부자라는 은행가이자 상인으로 실질적으로 피렌체 국가를 지배했다. 메디치궁은 메디치 가문의 저택이다. 내부는 현재 많이 바뀌었지만 기본구조는 1460년 지어졌을 때 그대로다. 외양은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일부 학자는 메디치 가문을 일으킨 코시모 데 메디치를 ‘참주’ (그리스 도시국가의 독재자)로 부를 정도지만 메디치궁은 의외로 단순하다.

전체가 3층 건물로 1층에는 열주식 기둥이 서 있는 안뜰이 있고 방은 2층부터 시작된다.

코시모 데 메디치를 시작으로 아들 피에르, 손자 로렌초로 이어지는 메디치 가문의 지배시기 3대 58년(1434~1492년)이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가장 융성한 시기다. 건축과 조각·회화 등에서 브루넬레스키·도나텔로·보티첼리·시뇨넬리 등의 인물이 잇따라 나온다.

메디치의 심모원려를 볼 수 있는것은 베키오궁과 시뇨리아 광장이다.

르네상스 시기 피렌체는 공화국이었다. 그리고 시민들이 대표를 뽑아 정치를 했다. 공화국 정부청사였던 베키오궁은 크고 화려하지만 실질적인 지배자의 거처인 메디치궁은 작고 소박하다.


시뇨리아 광장에 면한 우피치미술관은 피렌체 르네상스의 최고 작품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로마 판테온 이후 처음으로 돔 형식의 지붕을 채택한 아름다운 두오모 성당과 함께 피렌체를 방문한 사람이 빼놓을 수 없는곳이다.


▧ 새로운 시대를 노래한 예술가들

지금이나 옛날이나 예술가들은 고달프다. 창작활동만으로 ‘밥 벌어먹고’ 살기는 힘들다. 역사상 문화예술의 꽃이 가장 화려했던 피렌체의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이 예술가들을 후원한 이유는 무엇일까.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무덤이 있는 산로렌초교회의 메디치 집안 묘지에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조각가 도나텔로의 무덤도 있다. 코시모는 도나텔로의 예술활동을 적극 후원했고 이에 감동 받은 도나텔로가 1466년에 죽으면서 자신을 코시모 옆에 묻어달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다.

코시모가 도나텔로 등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은 성격상 그들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절반은 그렇다. 나머지 절반은 그들을 ‘이용’했다.

메디치가는 실제 피렌체의 신생가문이었는데 시민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서는 ‘신화’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를 위해 예술가들이 동원됐다. 메디치궁의 기도실 벽면에는 ‘동방박사 행렬’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고촐리가 그린 것이다. 아기예수를 찾아가는 동방박사 3명 중 하나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예수를 후광으로 한 이미지 만들기다.

메디치는 화가나 조각가들을 후원하면서 기존의 종교화가 아닌 고대로마에서 유래한 인문적 작품을 만들도록 한다. ‘플라톤 아카데미’라는 학술연구소를 세워 고대 그리스 철학도 연구한다. 이를 통해 자기 가문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목적에서다.

이러한 경향은 종교 쪽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교황청이 돈을 댄 많은 작품이 로마의 산피에트로 성당(성베드로성당)과 시스티나 예배당·바티칸박물관을 장식하기 시작한다.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의 와중에 기독교 본산을 방어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원래 예술을 정치에 이용한 예의 대표는 고대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로 일컬어지는 아우구스투스다. 당시 시인인 베르길리우스·호라티우스가 후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도 황제가 직접 나서기에는 면목이 없었는지 그의 왼팔이었던 마에케나스가 후원을 대신했다. 현재 예술가에 대한 후원활동을 마에케나스를 프랑스어 발음으로 한 ‘메세나’(mecenat)라고 부르는 이유다.


▧ 유럽으로 퍼지는 르네상스

시기상으로는 이렇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걸친 이탈리아를 이해하려면 공간이동을 해야 한다. 포로로마노(5세기 이전)에서 피렌체(14~15세기 르네상스)로, 그리고 다시 로마(16세기 르네상스)로 돌아온다.

피렌체 르네상스의 종말은 프랑스 등 이탈리아 외부국가의 침략에서 시작된다. 피렌체 예술가들은 대거 로마로 이동한다.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와중에 로마교황청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르네상스 정신을 적극 흡수하게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르네상스의 대표적 인물인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이 시대에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대표적으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등의 그림과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 등이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유럽으로 확대되기 시작한다. 베네치아를 거쳐 프랑스·독일로 이어지면서 유럽을 풍미한 것이 르네상스다.


<피렌체·로마 - 최수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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