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초대 워싱턴 대통령부터 제6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까지는 모두가 미국의 귀족출신이었다. 그들의 선거운동 방법이나 정치스타일도 귀족적이고 점잖았었다. “너 죽고 나 살자” 라는 식의 결사적인 선거운동을 하지 않았고 대규모의 선거부정이나 부패가 없었으며 정적을 헤어 나오지 못할 궁지에 몰아넣는 것 같은 비인간적인 행동은 서로 자제하였고 비교적 신사적으로 정치를 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통과 rule of the game이 제7대 앤드류 잭슨 대통령 때부터 근본적으로 뒤바뀌었다.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북부 수구귀족출신과 남부 신생귀족출신의 야합으로 서민출신인 자신이 억울하게 낙선되었다”고 확신한 잭슨은 연방 상원의원 직을 사직하고 “애덤스와 클레이를 몰아내고 정부를 국민에게 환원시킵시다”라고 외쳐대며 비전통적인 정치수단까지 동원하여 4년간의 끈질긴 운동 끝에 제7대 대통령에 당선 되었으며 ‘서민출신으로 서민다운 대통령’이라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었다.
많은 미국 사람들도 그렇게들 생각하였던 듯 하지만 사실은 그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일찍이 자수성가한 남부귀족이었으며 더러는 그의 무식,무지,편견, 타협성 없는 고집스러움들이 그전까지 보아왔던 대통령들의 ‘양반스러움’에 비해서 서민적이라고 곡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잭슨의 전임자로써 마지막의 귀족출신 존 퀸시 애덤스 제6대 대통령 얘기를 잠시 한 후 다시 잭슨으로 돌아오기로 한다. 몬로 대통령의 2차 임기가 끝나고 새 대통령의 선거가 있게 된 1824년에는 야당이었던 Federalist당은 이미 없어졌고 공화당이 단독으로 선거를 치르게 된다. 강력한 야당이 없어지자 공화당은 전국적으로 단결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졌고 차츰 더 심각해지기 시작한 미국의 병폐인 지역별 분열이 노골적으로 대두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대통령후보 공천을 위한 전국적 전당대회 같은 것은 없었고 각 당의 하원의원총회에서 자당의 대통령후보를 공천 하였었다. 1824년의 선거 때에는 유일한 정당이었던 공화당내의 군웅이 할거하여 하원의원총회, 각 주의회, 각 주 정당후보 공천대회 등에서 각 지역별로 제멋대로 대통령후보들을 내어 놓았다.
공화당 하원의원 삼분의 일만 참석했던 의원총회에서는 조지아 주의 William H. Crawford를 대통령후보로 공천 하였는데, 매사추세츠 주의 존 퀸시 애덤스, 테네시 주의 앤드류 잭슨, 켄터키 주의 헨리 클레이 등이 비전통적인 방법으로 대통령후보로 공천되었다.
잭슨, 매디슨, 몬로 등 전 대통령들의 후원을 받은 재무장관 Crawford 는 구 남부 주들의 지지를 받은 강력한 후보이었으나 전신마비 병에서 회복되지 못한 상태이었다. 뉴잉글랜드 지역 출신인 존 퀸시 애덤스는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아들이었고 풍부한 외교경력이 있는 국무장관을 지낸 인물인데 대통령수련이 잘 되어있는 분이었으나 자기아버지를 닮아서 성격이 차갑고 거동이 경직스러워서 인기가 별로 없던 사람이었다.
한편 성격이 따뜻하고 거동이 매력적이었다는 하원의장 헨리 클레이는 서남부지역 주들의 지지를 받은 분으로서 각 후보들 중 가장 대통령이 되기를 소망했던 사람이었다. 1812년 미영전쟁 끝에 뉴올리언스에서 영국군을 통쾌하게 섬멸한 테네시 주의 앤드류 잭슨은 전쟁영웅이었으나 그의 지향하는 정책이 불분명한 인물이었으며 그 까닭에 다른 후보들보다 정적이 적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구 서남부 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는 몬로 대통령의 전쟁부장관이었던 John C. Calhoun을 내놓았는데 그는 유능한 행정가였고 성격이 부드럽고 대화술이 좋았으며 매력적인 거동을 가진 신사풍의 후보이었다. 당시 42세 이었던 Calhoun은 얼마 후 부통령후보로 단독출마하기 위하여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자퇴하였다. 1824년 대통령선거 운동은 전례 없이 야비하고 격렬하였다. 아마 이때부터 선거운동에 뇌물, 폭력 등 불순한 수단들이 쓰이기 시작했던듯하다.
투표결과 잭슨은 뉴잉글랜드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최다 표를 받았다. 선거인단 투표의 개표결과 잭슨은 전국에서 99표를 받았고 뉴잉글랜드 지역과 뉴욕 주의 지지로 애덤스는 84표를, Crawford 는 주로 남동부 쪽에서 41표를, 클레이는 구 북서쪽에서 37표를 받았다. 과반수를 받은 후보자가 없었던 탓에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하원이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다.
헌법개정 제12번에 의해서 다수득표 상위후보 세 명만 하원의 결선에 참가하게 되었다. 전신마비상태인 Crawford는 사실상 탈락되었고 애덤스와 잭슨만이 혈투를 벌이게 되었다. 승패의 열쇠는 결선에 끼지도 못한 클레이의 수중에 있었다. 애덤스와 클레이는 잭슨을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클레이는 Jackson 을 서남부 쪽의 정적으로 경계하고 있었으며 애덤스는 서부 쪽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 클레이가 필요했었다.
애덤스와 클레이가 회동했던 일이 있었으나 그들 간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갔었는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서남부 출신인 클레이는 자기의 지지표를 뉴잉글랜드 출신인 애덤스에게 모아주어 애덤스가 1차 투표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에 당선된 애덤스가 클레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자 서부의 한 신문은 클레이를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도박자이고 배신자” 라고 혹평하였으며 잭슨은 클레이를 ‘서부의 유다’라고 불러서 그 후에 클레이의 대통령 꿈은 완전히 깨지게 되었다. 애덤스도 임기 내내 클레이와 ‘부패한 야합’을 맺어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란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애덤스는 국회에 보낸 첫 연두교서에서 ‘도로, 운하의 건설, 해군의 증강, 국립대 학교 건립’ 등 장래의 국력강화를 위해 과감한 정부 투자를 주장하였으나 아직 연방정부에 대한 신뢰가 별로 없는 국민들의 생각을 알아차린 클레이는 이러한 애덤스의 정책에 찬동하지 않았었다. 애덤스 는 그의 국가산업 확충을 위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하여 새로운 관세들을 부과하기 시작하였고 기존의 세율을 올리기도 하여서 임기 말쯤에는 인기가 더욱 떨어졌었다.
애덤스는 장기적이고 원대한 국가관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국민들을 설득하고 국민의 지지를 얻는 데에는 실패했었다. 몬로 대통령 밑에서 많은 외교적인 업적들을 이루었던 애덤스는 막상 대통령으로서는 별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단임 대통령으로 끝을 맺었다.
이때까지의 투표제도를 대강 살펴보기로 하자. 유권자의 자격은 각 주가 결정하도록 되어있었으나 거의 모든 주들이 여성과 노예들에게는 투표권을 주지 않았었고 얼마 되지 않았던 ‘자유흑인’들에게도 일반적으로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었다.
1820년대 초까지 에는 대부분의 주들이 규정된 최소한의 재산 (주로 농토)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투표권을 주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존 애덤스,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들과 존 마샬 대법원장도 책임 있는 시민들에게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다. ‘최소한의 재산’이 아주 많은 액수는 아니었던 까닭에 거의 모든 백인성인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진 셈이었으나 주에 따라서는 흑인들과 여성들에게는 1900년대에 들어서서야 투표권 이 주어진 곳들도 있었다.
1700년대 말까지도 직접민주주의를 하던 많은 곳에서는 영국에서 건너온 관습대로 타운 미팅에서 구두로 (voice voting) 투표하는 것이 관례이어서 공개투표나 마찬가지였다고 하는데 켄터키 주는 1890년까지 구두투표 제도를 썼다고 한다.
그 후 점차적으로 투표용지를 쓰는 투표를 하였는데 백지에 후보자나 선거인단의 이름을 적어 넣도록 되어 있어서 글을 쓸 줄 모르던 많은 무학자들은 아마 투표를 할 수 없었던 듯하다. 1800년대에 들어오면서 후보자 이름이 인쇄된 투표용지를 정당에서 주기 시작하였는데 정당별로 다른 색깔을 썼던 탓에 농장주나 공장주 등 이해관계자들이 멀리서도 감시를 쉽게 할 수 있는 사실상의 공개투표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는 그 후 200여년이 지난 후에도 민간독재이던, 군사독재이던 간에 독재를 해오던 1960, 70, 80년대까지도 자행되었다는 사실상 이와 비슷한 선거부정은 미국에서도 남북전쟁이 끝난 1860년대 이후에서야 완전한 비밀투표가 제도적으로 보장됨으로써 방지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