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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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812년 제2차 미.영전쟁 (1)

2014-11-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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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제퍼슨 대통령은 Federalist 당과의 계속된 불화에도 불구하고 2대에 걸친 대통령임기동안에 많은 업적을 남기고 퇴임했다. 그는 영국과 불란서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풍부한 외교관 출신답게 무력을 쓰는 전쟁이 아니라 국제조약 등을 포함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처하고자 하였으나 영. 불과의 국제문제는 끝내 시원히 처결되지 않았었다.

영국과 불란서에 대한 무역금지, 수입관세 등의 정책을 써보았으나 미국의 아직 미약했던 국력과 무력을 알고 있는 영국과 불란서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 채로 도리어 미국수출에 지장을 더 받아서 미국의 경제가 더 어려워진 상태에서 대통령직을 퇴임하였다.


제퍼슨 아래서 국무장관을 하던 제임스 매디슨은 제퍼슨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공화당 의원총회에서 공화당 대통령후보가 되고 1808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버몬트를 제외한 Federalist 당의 아성인 모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전패하였으나 남부와 서부의 지지를 얻어서 선거인단 투표 에서 122 대 47로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Madison 은 버지니아출신 부자(2,500 에이커 농장주)로서 미국의 독립선언서 작성위원 등 독립전쟁 전부터 학식(지금의 프린스턴 대학교인 College of New Jersey 졸업)과 정치경력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독립전쟁전의 미국의 국회 격이었던 대륙의회는 의원들의 신변보호를 위해서였던지 속기록을 작성하지 않았던 탓에 그 기간의 회의 중에 누가 무슨 내용의 발언을 하였는지 등을 공식적으로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매디슨은 일기형식으로 매일 누가 무슨 발언을 했는지 회의 진행과정을 기록해 놓아 그때의 비공식적인 ‘대륙의회 속기록’을 만들어 놓아서 그것들이 유일한 미국의 공식적인 역사기록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건국 공로자, 대륙의회 의원, 워싱턴 대통령의 고문, 공화당 창당자 등 마지막으로 국무장관까지 지냄으로써 말하자면 대통령직 수련을 잘 받아 58세에 대통령에 선출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련이 반드시 훌륭한 대통령을 만드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큰 업적을 남긴 대통령 축에 끼지는 못한다. 그는 ‘Man of Ideas’이었으나 체모는 키 163센티미터 (5’4”) 에다가 체중은 100파운드 이하로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왜소했던 사람으로 리더로서의 카리스마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키 6’3”에 체중 190 파운드로써 우선 체격으로 사람들을 위압했던 워싱턴 대통령과는 아주 대조적인 체구이었다.

그의 부인 Dolley (혹은 Dolly, Dollie) 는 아주 재치 있고 우아하며 사교적인 First Lady로써 내조의 공이 컸었다고 한다. 그녀는 독신으로 있었던 제퍼슨 대통령의 임기 말 쯤에는 공식석상에서 First Lady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25세에 두 아들을 가진 채 남편을 황열병으로 잃고 과부가 되었다가 26세 때 17세 연상의 노총각 매디슨을 만나 재혼했다. 부모 때부터 퀘이커 교도였던 Dolley 는 ‘비Quaker교도’와 재혼했다는 이유로 퀘이커교에서 출교를 당했다.

매디슨 부부는 완성된 대통령관저에 처음 입주하였는데 Dolley 가 건축가의 도움을 받아 백악관 내부를 장식하였다고 한다. 1812년 미영전쟁으로 영국군이 워싱턴을 점령 하였을 때 혼자서 버지니아 주로 피신해야했던 Dolley 는 워싱턴 대통령의 초상화를 피난시켰는데 그 초상화가 불타기전 백악관에 있던 재산 중 유일하게 보존된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 연금제도 등이 없을 때였던 탓에 Dolley는 81세까지 살았던 말년에 생활이 어려웠었다고 하며 미국국회는 그녀에게 매디슨 대통령의 유명한 ‘대륙의회 속기록’의 편집자란 명목으로 상당한 보수를 지급하였다고 한다.

제퍼슨 대통령 때인 1805년쯤에는 미국의 무역이 활발해져서 미국 무역선들이 급증하였는데 한해에 4,200명의 선원을 증모해야 했었던 탓에 선원월급이 8달러에서 24달러로 인상되었었다고 한다. 영국의 상선과 해군군함에서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고생하던 사람들이 음식도 더 좋고 월급이 월등히 많고 선원을 우대하던 미국 배들로 탈영하여 왔다.

계속되는 영불전쟁으로 해군병력이 부족했던 영국은 수시로 미국선박과 해군군함 을 해상에서 정지시키고 수색하여 탈영병이란 이유로 선원들과 해군을 체포하여 갔는데 1812년 미영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는 한해에 6천명이 잡혀갔다고 매디슨 대통령이 국회 보고에서 추측하였다.


제퍼슨 대통령이 재임하던 1807년 6월에 영국군함이 해상에서 미국군함 Chesapeake 호를 수색하려다가 미국 측이 불응하자 바로 옆에서 함포 세발을 미국군함에 발포하여 해군 세 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 미국군함이 돌아오자 영국과 당장 전쟁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으나 국력의 한계를 알고 있던 제퍼슨 대통령은 영국에 강력히 항의하고 몇 가지 보복정책을 선포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처리하였다.

미국의 서남부의 주들에서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계속 서부 쪽으로 농토를 넓혀 가고자 하였기 때문에 항상 미국원주민들과 충돌이 있었고 원주민들이 최신 무기로 항전을 하자 영국이 원주민들에게 무기를 공급해주고 미국 ‘개척자’들을 공격하고 원주민 ‘연합국’을 구성하여 미국과 싸우도록 배후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때 사실상 영국이 무기 공급 등은 하였으나 원주민들이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고 한다.

드디어 1811년 11월에 인디애나 영토의 지사이었던 해리슨 장군 (후일 대통령) 은 90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원주민연합의 추장이 살고 있던 지역을 위협하자 원주민들이 선제공격을 하여왔고 미군들은 Tipppecanoe 라고 불리는 이 지역을 불 지르고 원주민 들을 학살하였다. 결국 ‘제2차 독립전쟁’이라 불릴 수도 있는 ‘1812년 미영 제2차 전쟁’ 의 첫 불씨가 튀어진 것이다.

당시의 미국 하원은 영국을 극도로 증오하고 있던 주들 출신인 켄터키 주의 Henry Clay (국회의장) 과 남 캐롤라이나의 John Calhoun (후일 부통령) 등의 소장파 의원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영국으로부터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도 우유부단 하였던 매디슨 대통령에게 대영 강경정책을 채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영국의 통상 방해, 선원납치, 해상봉쇄 등에 이어 미국의 원주민 배후조종까지 있다고 판단한 이들 ‘매파’의원들은 1812년 6월1일 매디슨 대통령이 영국의 부당한 행동들에 관한 보고서를 국회에 제출하자 아주 대영국 선전포고를 의결하고 우선 캐나다를 점령해 버리자고 나섰다. 이들은 미국은 인구가 7백만 명인데 비해 캐나다는 50만 명뿐이고 그나마 대부분 불란서계 사람들이므로 영국에 협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정규군 7천명에다가 있으나마나한 민병대 40만이 있었지만 캐나다에는 영국 정규군 8,500명 이외에 민병대 4천, 인디안 3천이 있어서 “켄터키 주 포수들 천명이 올라가면 몇 일안에 캐나다를 점령해 버리게 된다” 라는 미국 측의 장담은 어림없는 소리였다는 것이 곧 밝혀진다.

마침 대미 완화정책을 써보려고 하던 영국수상이 5월 12일에 암살되자 미국은 미국 땅에서 대영국 전쟁을 치르게 된다. 미 해군은 Constitution호 ( 산 박물관처럼 복원해서 지금도 쓰고 있는 미 해군의 유일한 목조 돗단 군함) 을 비롯하여 16척의 군함으로 97척의 영국군함들과 대적하였으나 영국 수송선들을 해상봉쇄 하는 등 많은 무공을 세웠다. 1812~13년 두 해 동안에 육상전투에서는 미국이 계속 참패하였고 디트로이트, 시카고 등 네 도시가 영국군에 함락된다. 뉴욕주 북부일부에서는 민병대가 승전하기도 하였으나 미국은 위태로운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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