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이 허가하지도 않고 시키지도 않은 엉뚱한 짓’을 하여 만들어 가지고 온 엄청난 액수의 계약인 불란서와의 조약서를 들고 와서 대통령 앞에 선 두 특사들의 떨리는 손과 창백한 얼굴들을 상상해보라. 제퍼슨 대통령은 이 조약서를 경악과 기쁨 속에서 받아 들였을 것이다. 또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자신의 두 기본 통치원칙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정치적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제퍼슨 대통령은 이와 같은 영토 확장에 대해서 “제헌과정에서는 영토 확장 등에 대해서는 Founding Fathers 들이 미처 감안하지 못했던 (‘metaphysical subtleties’) 까닭에 헌법에 문자로 권한규정이 되어있지 않지만 이 Louisiana Purchase 는 중요한 국제문제이니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통과시켜달라” 고 하원을 설득했고 드디어 1803년 10월에 상원이 조약을 비준하는 순간 미국의 영토는 두 배 이상으로 넓어졌다.
Louisiana Purchase 는 미국 역사상 두 가지의 큰 의미가 있다. 첫째 국가의 중요정책을 신속히 결정하기 위해서는 독재정치가 불가피하다는 ”정치학적 이론”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고 둘째로는 미국의 국토가 서부 쪽을 향하여 두 배로 늘어남으로써 결국 미국이 북미대륙에 남아있는 삼분의 일까지 서부 개척하여 동으로는 대서양, 서로는 태평양이라는 양대양을 가지게 되는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 미시시피 강에서 태평양까지의 넓이가 1,700 마일이나 되는 거대한 땅의 절반 이상이 총 한방 쏘지 않고 거저 미국으로 넘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토의 갑작스러운 확장을 전 국민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토의 확장으로 앞으로 새 주들이 생겨나면 동부 연안의 원 13개주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줄 것을 염려하는 터줏대감적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광대한 Louisiana Territory는 자연히 농토로 개발될 것임으로 남부 주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쉬워서 공. 상업, 무역 등이 주생업인 북부 주들의 입지가 약해질 수도 있을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담배, 면화, 쌀 등 노동집약적인 당시의 농업에는 노예들의 값싼 노동력들이 필수적이었던 까닭에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주들이 늘어날 것을 걱정하는 반노예주의자들도 있었다. 이때로 부터 50여년 후에 시작된 남북전쟁의 불씨는 이미 미국 건국초기부터 붙여졌다고 말할 수 있다.
제퍼슨 대통령은 Louisiana Purchase가 있기 훨씬 전에 미시시피 강에서부터 태평양까지에 이르는 미지의 광활한 땅을 탐색해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 국민들도 도대체 Louisiana Territory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분명히 알아보아야 하게 되었으며 기왕 나선 김에 그 경계선에서 태평양까지의 지역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보고도 싶어졌을 것이다.
드디어 미국국회는 이 탐험을 위해 2,500달러를 책정하였다. 제퍼슨 대통령은 다양한 경험이 있는 육군 장교 출신인 자신의 개인비서 Meriwether Lewis를 탐험대장으로, William Clark을 부대장으로 임명하여서 대원 40명과 함께 1804년 봄에 미시시피 강 입구로 부터 탐색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이 탐험대의 부차적인 목적에는 아시아와의 통상을 위해서 미대륙을 횡단하는 직행수로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과 미시시피 강 주변의 미국 원주민들에게 미국의 통치권을 과시하는 것도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들 탐험대는 1805년 12월 30일에 미국의 서부 최북단인 지금의 오리건 주에서 태평양에 당도하게 된다. 이 탐험대는 중간지점인 Louisiana Territory 의 경계를 지나서 소유주 불확실 지역들을 거쳐서 태평양까지 갔었지만 이들의 이 불법탐색 은 ‘무주공산에 말뚝을 박은 격’이 되어 추후 미국이 이지역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 개의 발판도 되었다. 이들은 지형, 지질, 자연자원, 동식물, 원주민 생활 등등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Louisiana Purchase가 자기들에게 궁극적으로 불리할 것으로 판단한 부유한 공, 상업자들과 무역업자들이 주축이 된 일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Federalist당 계통의 사람들은 이 지역이 미합중국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뉴욕 주까지 탈퇴움직임에 합류시키기 위해서 1804년의 대통령선거에 이미 부통령후보에서 탈락된 제퍼슨의 애물단지 Burr 부통령을 탈퇴 후에 생기는 국가의 대통령에 추대하겠다고 나섰었다.
Burr 부통령은 이런 움직임에 편승하여 일차단계로 뉴욕주지사에 출마하였다. 같은 뉴욕주 출신이었지만 Burr 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Alexander Hamilton 은 반대당인 공화당과 손을 잡고 선거 유세 등을 통하여 Burr 후보를 주지사 선거에서도 낙선되도록 했다.
1800년도의 대통령 선거에서도 Hamilton의 반대로 하원의 결선투표에서 제퍼슨 후보에게 패배한 Burr는 극도로 분개하여 Hamilton이 주지사 선거유세에서 자기를 모략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Hamilton에게 결투를 청했다. 드디어 1804년 7월 11일 이른 아침에 두 사람은 뉴저지 Weehawken의 허드슨 강변에서 상대를 향해 한방씩 권총을 쏘았으나 Hamilton만 총알에 맞아 그 다음날 사망했다.
독립전쟁시절 Washington 장군의 보좌관으로, 제퍼슨과의 이론적인 논쟁으로 수많은 ‘Federalist’ 논문을 쓴 정치철학자,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Founding Father, 나라를 위해서 다른 당 소속의 정적인 제퍼슨을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도록 해준 애국자인 미국 건국 초기의 거목 Alexander Hamilton이 권총 한발에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졌다.
Hamilton의 동상은 그의 손자가 세운대로 뉴욕시 센트럴 팍에 있으며 그의 유해는 맨하탄 월가근처의 브로드웨이에 있는 트리니티 교회에 묻혀있다. 뉴욕주와 뉴저지 주에서는 Burr의 체포영장이 발부되고 Burr는 서부로 도망한다. 그 후의 Burr 에게 일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잠시 후 대법원판례들에 관한 글에서 다시 계속하려 한다.
미국의 법원은 집권세력인 행정부와 의회를 독립적으로 견제하는 권한과 전통이 있다. 특히 연방대법원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정치력을 연방 행정부와 국회에 행사한다. 이때까지는 아직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임기 없는 영구직으로 근무하는 대법원판사들 6명은 4대2의 결의만 있으면 많은 대통령 들을 무력화 시킬 수가 있었으며 대통령과 국회가 손을 잡고 만들어 놓은 법률과 규율도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내려서 무효화시킬 수도 있었다.
제퍼슨이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던 1805년에 연방대법원은 여섯 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6명중 4명이 찬성하면 모든 대법원소송을 판결할 수 있었다. 제퍼슨이 당면한 심각한 문제는 대부분의 대법관들이 전 정권 때에 Federalist 당에 의하여 임명된 영구직 대법관들 이라는데 있었다. 제퍼슨은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도로 유일한 해결 방법인 대법관 탄핵재판을 시도하였다. 그중에서 미국역사에 가장 중요하게 기록된 탄핵재판이 사무엘 체이스 대법관의 탄핵재판이다.
체이스 대법관은 전 정권에 의해서 임명된 사람으로 반 공화당적 생각이 강력했던 사람이었던지 재판을 하면서 배심원들에게 주는 지침에서 “공화당은 불한당 같은 놈들이다” 라고 해석될 수 있는 표현을 거침없이 쓰는, 공화당에게는 아주 불편한 존재였다. 제퍼슨 대통령은 이 체이스 대법관을 탄핵으로 손봐주기로 결심하였다. <조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