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딩 숲 사이 휴양지.마음의 안식처
▶ 조성
1844년 윌리엄 브라이언트 공원 건설 캠페인 시작
‘가난한 이들도 부자들의 풍류 똑같이 누려야...’ 평등주의 입각
프레데릭 옴스테드. 칼버트 보 ‘Greensward Paln’디자인 바탕 공원
초고층 빌딩이 밀집한 맨하탄 한복판에 넓이 3.4㎢(843헥타르)에 달하는 대형 공원이 장관을 이룬다. 신호등의 빨간 불조차 참지 못할 만큼 ‘바쁘고 부산한’ 뉴요커들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마음의 여유를 찾고 느긋이 산책을 즐긴다. 한가로이 조깅하는 사람들. 가족과 연인, 그리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찾는 이곳은 뉴요커들을 위한 도심 속의 휴양지요 마음의 안식처다.
흔히 ‘뉴욕의 허파’로 일컬어지는 센트럴팍(Central Park)은 맨하탄 섬 한가운데 위치한 공원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5개 보로로 구성된 뉴욕시의 중심이란 뜻이 아니라, 섬 가운데 자리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건국 100주년을 기념해 탄생했을 때만 해도 대다수 주민들은 ‘이 공원이 길 한복판에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센트럴이란 말을 붙이냐’며 조소한 일화를 떠올리면 조성 초기만 해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도시민의 환경 결핍을 대체하다
19세기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도시화가 진전되자, 그 반대급부처럼 환경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일대에 빌딩이 대거 들어서면서 ‘도시민의 결핍된 환경을 대신해 장대한 자연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그로 인해 1844년 윌리엄 브라이언트가 자신이 편집하던 신문 ‘뉴욕 이브닝 포스트’에 공원 건설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작가 워싱턴 어빙과 정치가 반 크로포드가 지원하며 공원 조성 계획은 점차 구체화되었다. 그 결과 1853년 주의회는 맨하탄에 공원 신설 권한을 시 정부에 부여, 이후 시 정부는 500만 달러의 토지 구입비를 써 5~8애비뉴, 59~106번가 일대의 토지(남북 4㎞, 동서 800m)를 대상으로 확정했다(6년 뒤 110번가까지 확장).
■목가적 가치와 평등주의를 심다
센트럴팍의 디자인은 일반 공모로 결정되었다. 여기에 당선된 것이 프레데릭 옴스테드와 칼버트 보의 ‘Greensward Plan’이다. 이후 ‘브루클린의 대표 공원’ 프로스펙트팍을 비롯해 어퍼 웨스트 리버사이드팍의 조성 작업까지 함께 한 이들은, 이상주의자와 그 이상을 현실로 만드는 기술 체현자 조합으로 남다른 파트너십을 자랑했다.
그런 이들이 내세운 첫 번째는 ‘단일성과 조경성을 강조한 목가적 가치’, 그리고 두 번째는 ‘가난한 이들도 부자들의 풍류를 똑같이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평등주의의 가치’였다. 이로서 1858년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어 배수로와 평탄화 작업이 진행되었다. 많을 때는 3,800명이 동시에 작업할 만큼, 대형 공사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다.
공원 중간 중간 총 4개의 트랜스워즈(어퍼 이스트와 웨스트를 잇는 도로, 어퍼 이스트 기준 66, 79, 86, 97번가)를 비롯해 36개의 교량과 분수, 잔디밭, 테라스 등을 부대시설로 더했다.<이수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