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글의 제목을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것저것 생각을 해보다가 자칫 다른 표현을 쓰면 필자의 기본적인 의도보다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부드럽게 들리지만 사실은 의미가 조금 애매한 “개척”이란표현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개척이란 표현대신 개발, 개화, 정복, 강탈, 약탈, 착취, 날강도, 문명화, “선교” 등등 조금씩 함축된 의미는 다른 표현을 써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 어느 것을 쓰더라도 필자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는 필자의 감상을 그대로 그려내는 데에는 미흡하기 때문이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필자는 “남북미대륙은 영구히 원주민들의 손에 맡겨 놓았어야만 했었다” 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아니다. 설령 콜럼버스가 없었더라도 지난 5백 년 동안 황인종이나 흑인종들이 백인들 대신에 오지 말았어야 한다는 법도 없고 그들의 “식민정책”이 백인들보다 더 부드러웠거나 자선적 이었으리란 보장은 더욱 없다.
어느 경우에나 원주민 입장에서는 똑같이 분하고 원통한 일이었지만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쓰는 표현이 달라질 것이다. 미국을 뒤따라 거의 모든 남미제국이 1840년대쯤에는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였지만 극도의 소외와 혼혈 등으로 원주민이 다수족으로 남아있던 나라는 거의 없었고 원주민의 피가 조금 섞인 새 주인들 밑에서 노예 같은 생활을 하기는 변함이 없었다. 남미의 ABC 삼국은 항상 백인들의 후예가 집권하였고 페루에서도 2천 년대에 들어서서야 원주민 후예가 처음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콜럼버스 이후 근 50여 년간 스페인이 아무나라의 간섭도 없이 남미의 황금을 퍼내어서 세계 최강국이 되어가고 있는 동안 영국과 불란서는 저희들끼리 싸우느라고 정신을 놓고 물자를 탕진하다가 뒤늦게야 스페인의 횡재소식을 듣게 되었다. 영.불 간의 불화가 미국의 독립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을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아직도 정확히 세계가 어떻게 생긴 줄을 모르고 있던 이들은 뒤늦게나마 남북미대륙 어딘가에 뚫려있을 “황금의 나라 중국”을 가는 길을 찾아 나섰다.
이무렵 스페인은 그랜드캐년 ,아칸사스, 조지아, 앨라배마와 미시시피강까지 탐사를 하였으나 그곳들에 정착하지는 않았었다. 불란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베라자노를 시켜서 북미주 동해안을 한번 훑어본 후 어부들이 뉴펀들랜드에 와서 물고기를 잡아가는 정도로 게으름을 부리고 있다가 1534, 5년에 Jack Cartier가 중국, 인도로 가는 지름길을 찾다가 캐나다의 St. Lawrence강을 탐사하고 그 강으로 깊숙이 들어가 몬트리올까지 가보고 온 후 지금의 퀘벡 시에 진지를 치고 정착하려고 하였으나 삼년동안 본국에서 지원이 없자 Cartier는 불란서로 돌아가 버렸다. .
그는 유럽인으로써는 처음 캐나다를 탐사한 사람이었고 캐나다란 이름도 지으면서 그곳을 불란서영토라고 선언했다. Cartier가 떠나가고 있을 때 당도한 보급물자를 싣고 온 배의 선원들이 퀘벡에 정착해보려고 노력하다가 그들도 그 다음해에 돌아갔는데 그런 연고로 불란서가 퀘벡지역에 후일 발판을 붙이게 된다.
영국은 여러 명의 봉건영주들이 서로 싸우느라고 국력을 탕진하는 보잘것없는 나라로 있다가 헨리7세가 리처드 3세를 치고 나라를 통일하고 Tudor 왕조를 세운 후 왕후 여덟 명중 서너 명을 사형시키고 영국을 천주교에서 떼어낸 무자비한 왕 헨리8세 때 왕권이 강화되고 제법 국력도 커졌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때인 1588년에는 영국을 침공해온 세계 최대강국 스페인 함대를 두 번이나 성공적으로 물리쳐서 스페인을 쇄국의 길로 몰아넣었다.
영국은 헨리7세 때인 1497년에 이태리 Genoa출신으로 영국에 와서 살고 있던 John Cabot를 보내서 뉴펀들랜드에 착륙하였었고 1498년에 다시 북미주에 온 Cabot가 미국에 당도했었을 지도 모른다고 하나 분명치 않다고 한다. 헨리 7세는 이와 같은 “사실” 을 근거로 전 북미대륙이 영국영토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엘리자베스 1세 때에는 Sea Dogs 라고 불리던‘ 국립해적대’를 만들어 캐리비안 아일랜드에서 금을 실고 본국으로 가는 스페인 선박들을 privateering (해적질)하였다.
이 해적질이 스페인의 영국침공의 주요 이유들 중의 하나였었다. 1578년에 험프리 길버트가 북미주 북쪽으로 중국 가는 항로를 찾으려 시도했다가 돌아갔다. 그는 다시 1583년에 배 다섯 척을 이끌고 오다가 한척은 물이 새어서 돌려보냈고 네 척은 뉴펀들랜드에서 식민기지를 만들고 그곳을 영국영토라고 선언한 후 영국으로 돌아가던 중 강한 풍랑을 맞아 전 선원들과 함께 익사해 죽었다.
근세 영국 역사 중 가장 전성기가 되었던 엘리자베스1세 여왕 시대에 영웅소설의 주인공감쯤이 될 만한 Walter Raleigh라는 “무사, 탐험가, 정치인, 작가, 시인” 등으로 알려진 전설적 인물 Walter Raleigh가 등장한다. 그는 험프의 어머니가 재혼해서 낳은 동생으로서 옥스퍼드대학교에 다녔으나 졸업장은 못 받은 인물인데 군인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전해 무공을 많이 세운 후 여왕친위대의 장교로 근무했다.
여왕의 총애를 받아 작위까지 얻었으나 여왕 몰래 여왕의 시종귀인 (Lady in waiting)과 결혼한 것이 발각되어 1592년에 London Tower에 구금되었다가 7년 후에 풀려났다 그때쯤에는 Cabot와 Gilbert의 탐사를 빌미로 영국은 북미주 전부를 영국령으로 치고 있을 때인데 여왕은 Raleigh에게 북미개척권 (Charter)을 주었다. Raleigh는 남미의 베네주엘라 어딘가에 있다는 금은보화의 나라 ‘엘도라도’를 찾아 탐험대를 이끌고 갔다 온 적이 있는 사람이다.
1584년에 그가 보낸 개척단이 지금의 North Carolina주 Roanoke Island에 도착하여 정착하기에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때 그 지역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처녀이었던 점을 고려해서 ‘버지니아’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다시1585년에 여왕의 도움도 조금 받고 자신의 막대한 재산도 투자한 이외에 지금의 “주식회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Joint Stock Company를 설립해서 자금을 모은 후 백여 명을 보냈으나 일 년 후에 모두 귀국하였다. 또다시 1587년에 개척단 백여 명을 Roanoke Island에 정착하도록 내려놓고 왔다. 금은보화는 얻어온 것이 없었지만 Raleigh는 영국 도처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 후 삼년 여간 스페인의 해상습격 우려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개척단은 방치된 채 본국에서 지원을 보내지 못하였다.
삼 년 후에 개척지원단이 Roanoke Island에 당도하였을 때에는 진지는 아무 인적도 없이 폐허상태가 되어 있었다. 유일한 흔적은 나무판에 ‘크로아톤(CROATOAN)’이라는 글자만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계속해서 이 첫 개척단의 종적을 찾아보려고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여 지금까지 미국역사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역사학자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내어놓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첫 개척단을 ‘Lost Colony’라고 부른다. 그중 한 가지 설은 이들이 그 근처에 있던 크로아톤 원주민들에게 잡혀갔거나 아니면 그들과 합류했을 것이라는 추측인데 그 원주민들의 후손들 중에는 개척인들이 썼던 성씨 41개를 성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고 백인들의 눈 색깔과 머리 피부 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혼혈현상은 그 지역 딴 원주민들 중에도 나타난다고 하는데 기록으로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