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럼버스 이전과 이후의 남북미 대륙 (하)
정복의 목적이 “God, Gold, Glory”이었다는 스페인의 미대륙 정복은 어느새 무자비한 착취로 변질되었으며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그들의 3 G’s 목적 중 어느 것이 우선순위를 가졌던 것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는 것 같다.
미국의 역사를 들여다 볼 때에 목적이야 어떻든 간에 동원된 방법으로 살상, 착취, 인종차별, 문화말살 등... 을 썼다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분개를 하다가도 그 다음순간 잘생긴 devil이 설득력 있는 어조로 “그러면 이 미대륙이 영원히 미개한 원주민들 속에 영구적으로 남겨져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부드러운 말로 따져오면 자기도 모르게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고 나서는 “그러면 나의 주장은 무엇인가” 라고 자문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내 재산은 자본주의식으로, 네 재산은 공산주의식으로 쓰여야한다’는 근본적인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그런 “사상”이 쉽게 고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스페인의 약탈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남미가 북미보다 문화적으로 훨씬 앞서 있었고 통치체계도 제대로 되어있던 제국들이 있었는데 왜 지금은 북미에는 미국, 캐나다라는 선진국들이 생긴 반면 남미는 조각 국가들이 후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첫째의 원인은 영국과 스페인의 식민정책이 달랐다는 점이다. 불갈비로 먹었건 갈비탕으로 먹었건 소를 잡아먹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식민정책의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남북미의 역사가 증명해주었다.
영국은 북미대륙의 원주민들을 다 정리해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하는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다고 한다. 반면 스페인은 명색 기독교인답게 원주민들을 기독교인들로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왔다. 아니 ‘그냥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노예인 기독교인들’일지라도 명분이 좋지 않은가! 그래서 스페인의 미대륙 정복시절에는 Conquistador와 천주교신부가 나란히 앞장서서 왔거나 아니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가며 들어왔고 그것은 전략상 아주 성공적인 정복방법이었다. 더러 신부들 중에는 원주민들의 인권보호를 위해서 맨발로 뛰어다니며 Conquistador들과 싸운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문 예외이었다.
남미의 천주교화는 외관상 극히 성공하였다. 가는 곳마다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천주교 성당이라는 것과 국민들의 90%가 천주교인이라는 것이 그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원주민문화는 말살되었고 아직도 원주민들 사회에 버젓이 살아있는 전통 샤머니즘을 볼 때에 천주교가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혹시 증오심을 숨기고 주인 앞에서 굽실거리는 노예들처럼 아직도 마음속에는 태양신을 믿으면서도 손으로는 성당을 지은 것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둘째로 스페인은 처음부터 스페인 사람들이 직접 나서서 원주민들을 노예로 착취하였다. 반면 북미에는 잡다한 이유로 이민 와서 자기들이 직접 일을 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며 영국이나 다른 모국들의 이미 발달된 문화와 기구들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처음부터 자치를 하며 살았었다. 남미의 원주민들이 뿌리를 뽑힌 잡초들이 되었다면 북미의 사람들은 새로운 옥토에 뿌려진 개량종 묘목들과 같았다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역사’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글에 남미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미와 북미는 거리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들로도 너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남미를 빼고 북미만을 얘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남미 역사를 조금만 더 짚어본 후 북미로 올라가기로 한다.
1540년 전후로 남미를 거의 완전히 장악한 스페인은 그 후 남미 여러 나라들이 독립이 된 1840여년 대까지 300여 년간 식민통치를 하였다. 식민지에서는 스페인이 필요로 하는 농작물과 기타 물품만을 생산하여 스페인에 수출해야하며 식민지가 필요로 하는 모든 물품들은 스페인을 통해서만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Mercantilism’이라는 식민지 착취정책을 써서 스페인은 수입.수출 양쪽에서 착취하였다.
어떤 사학자들은 1500여년에 5천만 명이던 남미 원주민들이 200년이 지난 1700년경에는 4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추측한다. 가장 무서운 무기는 백인들이 가지고 온 전염병들이었었다. 원주민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왔는데 1820년에는 총인구 1천7백만 명중 흑인이 75만 명이었다고 한다.
1519년에 34세였던 Hernando Cortes는 군인 550명, 말 16필, 대포 10문을 가지고 멕시코에 도착하여 1521년 8월13일에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약탈한 금은보화를 스페인 왕에게 보냈다. 중국무역보다 훨씬 더 쉬운 방법으로 금은보화를 획득하는 재미가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한 것이다.
1531년에 Francisco Pizarro는 군인 180명, 말 27필과 대포 몇 문을 가지고 Inca제국에 나타났다. 대포 몇 발을 발사하고 백마를 타고 들어와서는 왕을 나포하고 구금해 버렸다. 왕의 신하들과 협상 끝에 금 13,265 파운드와 은 26,000 파운드를 받고 왕을 석방시켜 준다. 그러나 왕의 보복이 두려웠던 Pizarro는 얼마 있다가 왕을 다시 체포하고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사형해 버리고 수도 Cusco를 점령한 후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고 금은보화를 다 약탈해가고 각 지역에 산재해 있던 산성들도 다 파괴해 버렸다.
독자들은 어떻게 백 명, 2백 명 정도의 Conquistador들이 그들보다 몇 십 배의 병력을 가진 이 제국들을 멸망시킬 수 있었겠느냐고 의아해할 줄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 남미제국들의 전설에 백인 신이 나타날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Conquistador들이 대포를 쏘자 천둥을 마음대로 조절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포탄작열로 사람들이 죽자 역시 정복자들이 임의로 조절한 벼락에 맞아 죽은 것으로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런 후 생전 처음 보는 백마에 타고 나타난 정복자들이 신같이 보였을 것이고 원주민들은 충성스럽게 신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라고 한다.
이 무렵에 Coronado, DeSoto등의 Conquistador들은 수백 명을 이끌고 소문에 떠도는 제2 잉카, 제3 아즈텍, ‘Seven Cities’등을 찾아 나섰다가 완전히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1600년대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뉴멕시코와 애리조나에 진입하였고 1712-21년에는 텍사스로도 옮겨갔다.
1721년에 캘리포니아에는 남쪽 샌디애고에서 부터 북쪽으로 샌프란시스코까지 21군데의 선교단지(Mission)가 있었다. Mission은 원주민의 부락에 교회, 학교 등을 지어놓고 학교는 원주민의 스페인화를 위해 영구교육기관으로 쓰였으며 교회에는 강제출석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Mission안에는 스페인 사람을 우두머리로 하는 농장들이 있었고 원주민들은 소작료를 내며 노예와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대동강 팔아먹은 사람도 있었고 뉴욕에는 ‘브루클린 브리지‘를 팔아먹은 사람도 있었다지만 그즈음 남미에는 북미에 대해서 끝없이 허황한 소문들이 난무했었는데 한 탐험가의 일화로 이들의 얘기를 끝내고자 한다.
필자가 십 수 년 전에 제주도에 관광을 가서 들은 얘기라고 생각되는데 진시황이 보낸 사람이 제주도에 와서 불로초(가짜?)를 구해가지고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고 해서 ‘서귀포’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제주도 출신 독자들께서 필자의 기억이 맞는 것인지 확인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어리석고 허황된 꿈이 있어 왔던 듯하다. 미국판 얘기는 아래와 같다.
후일 초대 푸에르토리코 총독이 된 Juan Ponce de Leon은 그곳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거나 그 물속에서 목욕을 하면 젊어진다는 ‘Fountain of Youth’가 북미 어디의 Bimini라는 섬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곳을 찾아 나섰다. 아마 그 물이 정력에도 좋다고 소문이 났으면 한국 사람이 먼저 찾아냈을 터인데!
끝내 Bimini를 찾지 못한 de Leon은 1513년에 어느 곳에 도착하였는데 하도 아름다운 꽃들이 많아서 ‘The Land of Flowers’라는 의미로 그곳을 ‘La Florida’라고 불렀다.. 백인으로 처음 플로리다에 발을 디딘 것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Gulf of 멕시코 이북의 북미 땅을 ‘플로리다’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스페인은 플로리다를 지키기 위해서 1565년에 지금은 유명한 골프장들이 많고 ‘Golf Hall of Fame’이 있는 St. Augustine에 요새를 짓고 1820년까지 버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