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4) 콜럼버스 이외의 탐험가들

2014-03-28 (금)
크게 작게
<조태환>

콜럼버스 가 미대륙을 발견한 1492년 이후 근 50여 년 동안 스페인은 브라질만 포르투갈에게 양보한 것 이외에는 라틴 아메리카 (라틴어가 모어인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 등을 쓰는 멕시코, 캐리비안 섬 등 남미를 통틀어 가리키는 말)를 전부 독식하였다. 또 스페인은 플로리다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북미대륙 남쪽지역들을 먹어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나 세계 최강국인 스페인에게 감히 도전하는 나라는 없었다.

그때에는 기독교 국가들이 발견한? ‘무주공산’ 새 땅들은 로마교황이 그 소유권을 인정해 주어야만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었다고 한다. 마침 스페인 왕 찰스5세의 후원으로 교황자리에 앉게 된 스페인출신 교황 알렉산더 6세는 대서양에 남북으로 일직선을 그은 후 그선 서부에 있는 땅들은 모두 스페인이 소유권을 갖는다는 칙령을 1493년에 발표해 버렸다. 브라질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포르투갈은 ‘닭 쫓던 개’꼴이 되어버리자 교황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분쟁이 더 심해지기를 원치 않았던 스페인은 교황이 분할 선을 서부로 이동하도록 하고 1494년에 포르투갈과 조약을 맺어 면적으로 세계 제5위국인 브라질을 포르투갈에게 양보했다.


‘금으로 길을 덮은 나라’인 중국을 찾아가려다가 실수로 미대륙을 발견하는데 성공한 콜럼버스가 있었다면 실패한 모험가, 탐험가, 탐욕자, 영웅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아마 수백 명은 되었으리라. 많은 콜럼버스의 후배들은 중국에 가기위해 미대륙으로 왔다. 첫째로 남북미 대륙이 얼마나 큰지를 몰랐었고 둘째로 미대륙을 남북으로 왔다갔다 하다보면 중국으로 갈수 있는 뚫린 통로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들을 했었던 탓이었다. 마치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멍청이들 처럼…

1540년대 이후의 탐험가들은 대게가 Spanish Concquistador (정복자, 약탈자) 들로서 중무장한 군인들과 함께 잉카, 마야, 아즈텍 등의 원주민 국가들을 멸망시키고 본격적으로 식민지 정복을 시작한 사람들이었지만 우리가 중학교 때 배우던 서양사에 나오는 모험가들은 본격적인 Concquistators 이기보다는 아직은 개척자, 무역항로 개발자들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몇 사람의 일화만 소개해 보기로 한다. 스페인에서 아이티로 와서 그곳에서 대농장을 경영해 보고자 했던 Vasco Nunez de Balboa 는 사업에 실패하자 채권자들을 피해 어느 날 항구에 정박한 배의 빈 통속에 숨어들어가 밀항을 했다.

배가 파나마에 도착하자 그는 배를 내리고 그곳에 정착한 후 타고난 수완을 발휘해서 그 지역 스페인의 총독도 되고 원주민 추장 딸과 결혼도 한다. 서쪽으로 가면 금이 있다는 장인의 말을 듣고 수백 명의 사람들을 동원해서 4주 동안 길이 없는 숲속에 길을 내며 45마일을 간 후 도착한 곳은 금이 있는 곳이 아니고 태평양이었다. 아니 1513년 9월29일에 태평양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그 바다를 ‘ Sea of the South’라 명명하고 그 바다물이 닿는 모든 땅은 스페인 소유가 된다고 선언했다. 간도 크지 이제는 전 세계를 통째로 집어먹겠다는 배짱을 내보인 것이다.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그는 그 바다에 지구의 모든 육지가 다 들어가도 모자라도록 크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콜럼버스의 제안을 거부해 가면서 동쪽으로 항해해서 인도에 가는 직항로를 발견하기 위하여 해양학교까지 운영하던 포르투갈의 왕은 드디어 1498년에 직항로를 발견하였다. 포르투갈의 귀족인 Vasco da Gama 가 1498년 5월에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 항로는 항해하기가 아주 위험한 항로이었으나 포르투갈의 향신료무역이 개발되도록 하였으며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식민영토를 확보하는데 통로역할을 하게 되었다.

불란서 Lyon 시의 상인들은 왕 프랜시스 1세의 허가를 받아서 Florence 선장 Giovanni da Verrazzano 에게 미주대륙을 통과하는 중국항로를 찾아보도록 하였다. 1524년에 노스 캘로라이나 주의 케이프 피어에 도착한 베라자노는 스페인 인들을 피하기 위하여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였는데 뉴욕 항을 발견하고 지금의 베라자노 브리지 근처에서 잠시 정차하고는 계속 북상하였다. 로드아일랜드 주의 뉴포트에서 원주민이 친절하게 대해 주어 2주간을 휴식한 후 다시 떠나서 Block Island, Nantucket, Cape Code 를 지나 메인주도 지나고 뉴펀들랜드까지 갔다가 돌아갔다.

그때까지 플로리다에서 뉴펀들랜드까지 이르는 북미주의 동부해안은 해안지리가 분명치 않았는데 베라자노가 해안선들을 더욱 분명히 알게 지도를 만들었다. 이 무렵의 모험가들 중에서는 포르투갈의 귀족이었던 Ferdinand Magellan 을 영웅으로 치지 않을 수 없다. 콜럼버스 가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면 “중국”에 도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면 Magellan 은 한술 더 떠서 “조금만 더 서쪽으로 가면” 아주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증명한 사람이었던 까닭이다.


Magellan은 스페인의 후원으로 5척의 배에 선원 265명을 싣고 1519년 9월20일에 스페인을 떠났다. 남미하단까지 가는데 일 년 조금 넘게 걸렸는데 그동안 선상반란 한번은 진압하였으나 배 한척은 난파되었다. 1520년 11월에 남미하단에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시켜주는 해협을 5주 동안 지나갔는데 이 해협은 암초가 많고 물결이 세고 좁은데다가 강풍까지 부는 곳이어서 매우 위험했다고 한다. 이 해협 항해도중 또 선상반란이 일어났고 배 한척은 스페인으로 돌아가 버렸다. Magellan 은 이 해협을 ‘The Straits of Magellan’이라고 명명했다. 그곳에서 일본까지는 만 마일이 넘는다는 것도 모르는 채 태평양에 들어섰다. 끝없이 4개월간을 항해하면서 하도 바다가 태평스럽게 잠잠해서 ‘태평양 (The Pacific Ocean)’ 이라고 명명했다.

식수와 식량이 떨어져서 곰팡이가 난 빵은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들까지 먹었고 배안에 있는 모든 가죽제품들도 씹었고 톱밥도 먹고 물고기도 많이 잡히지 않았던 탓인지 배에 살던 쥐들까지 모두 잡아먹었다고 한다. 채소를 오랫동안 먹지 못해서 비타민C의 결핍으로 선원들 19명이 괴혈병으로 죽었다. 거의 죽어가던 선원들이 세척의 배를 타고가다 1521년 3월에 괌을 발견하고 상륙했다. 괌에서 보급물자를 실은 배 두 척은 항해를 계속하던 중1521년 3월 첫 주에 스페인 왕 필립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필리핀에 도착했다.

필리핀에 체류하는 동안 원주민들과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두 원주민 부족간에 일어난 싸움에 싸움의 이유도 모르는 채 Magellan이 참견하다가 칼에 찔려(독화살을 맞았다고도 함)죽었다.

Magellan을 필리핀에 묻은 채 부서진 한척의 배를 버리고 두 척의 배는 스페인을 향해 가던 중 포르투갈의 해적들에게 한척의 배를 뺐기고 가장 작은 마지막 배 ‘빅토리아 호’에 선원 18명이 타고 삼년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Magellan 함대는 중국을 가기 위해 떠난 배가 아니었으며 비록 도중에서 Magellan 이 객사하기는 했지만 이 함대는 세계를 완전히 일주하는데 성공한 최초의 항해를 끝내었다.

서양인들은 미국을 서반구 ‘Western Hemisphere’라고 부르고 한국, 일본, 시베리아 등을 ‘Far East(극동)’라 부른다. 세계지도를 보면 서반구는 유럽을 지칭해야 맞고 극동은 미국의 메인주를 지칭해야 맞는 것일 터인데 우리가 틀린 지도를 가지고 지리공부를 해왔기 때문이다.

세계의 중심이 유럽이었을 때 만들어진 ‘바른’ 세계지도를 보면 당연히 유럽이 세계지도의 가운데 있고 서쪽으로 가면 서반구인 미국이 보이고 동쪽 끝으로 가면 한국, 일본, 시베리아 등이 극동쪽으로 보이지 않는가! 과학 이나 진실도 생각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지 않은지? ‘동해’가 맞느냐 아니면 ‘서해’가 맞느냐는 기싸움인 것이 아닌지?

** 베라자노는 그 후에 두 번 더 항해를 하였는데 두 번째 항해 때 들린 캐리비안 섬 중Guadaloupe 에서 원주민들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다.

1964년 11월 21에 개통한 베라자노 브리지는 원래 ‘브루클린 스태튼 아일랜드 브리지’ 로 명명될 예정이었으나 그전 해에 암살당한 ‘J.F. 케네디 브리지’로 명명하자는 제안도 나왔었으나 Italian Historical Society of America의 꾸준한 로비가 성공하여 ‘베라자노 브리지’ 로 명명되었으며 그전에는 ‘Idlewild’로 불리던 공항을 ‘JFK Airport’로 개명하였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