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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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미처 몰랐던 토막얘기들 ③ 영웅? 돈키호테?

2014-03-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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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년에 이탈리아의 Genoa 에서 털 방직업자 (wool weaver)의 아들로 태어난 콜럼버스는 애초에 한 도시에서 안정된 사업체를 운영하며 소상인으로 만족하면서 살 위인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23세가 되면서 북쪽으로는 아이슬랜드에서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남단까지 왕래하는 무역선들을 타고 다니면서 항해술에도 익숙해져 있었던 탐험심이 온몸에 가득 찬 야심가였던 듯하다. 그의 모험심과 일획천금의 꿈을 자극하는 것들이 그 당시에 많이 있었다.

역사상에는 “길거리를 황금으로 깔았다더라” 라는 소문이 난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해방직후 미국이 그런 나라라고들 해서 누구나 미국에 와서 살아보기를 열망했던 일이 있었고 남미의 잉카, 마야, 아즈텍 제국들은 사실상 왕궁 등을 금으로 씌워 놓아서 스페인이 그 금은보화를 다 빼앗아가고 식민지를 만들어 버린 적이 있다. 그 외에 또 “황금의 나라” 라고 알려진 곳이 중국과 인도이었다.

우리 신라에서도 고분 등에서 나온 유물들 중에는 아랍지역에서 제조된 유리병들이 있었다고 했던 것으로 보아 오래전 사람들도 어디 있는지도 미처 모르는 먼 곳 사람들과 무역을 하며 살아 왔던 듯하다.


베니스에서 살던 Maffeo와 Niccolo Polo형제는 Niccolo의 아들 마르코와 함께 중국(왕이 Kahn 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몽고이었던지)에서 17년간(24년 이라고도 함) 살다가 중국제 금 비단 보석류 등을 가져와 베니스사람들을 넋을 빼어 놓았었다고 한다. 그때 베니스에서 북경까지 가려면 일 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돌아오는 길에 비단 몇 필을 말 등에 싣고 노상강도를 피해서 길도 없는 산에서 산으로 사막을 지나 베니스까지 돌아오는 무역상을 한번 상상해보라.

글재주가 있던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썼고 그 후 200년쯤 후에 동활자로 이 책이 인쇄되기 시작하자 널리 읽혀져 타오르고 있던 콜럼버스의 탐험심에 기름을 쏟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중세 유럽의 과학은 미신과 기독교의 교리에 합당한 과학만을 진실로 쳐주고 있을 때라 ‘천동설’외에 딴소리를 내었다가는 당장 교황청으로부터 ‘이단’판결이 나던 때이고, 콜럼버스 가 미대륙을 발견하고 난 후인 1507년에 발간된 최신 세계지도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큰 땅 덩어리 한 개만 그려져 있었고 지중해, 자그마한 대서양이 그려져 있고 중간 중간에 강과 호수들이 그려져 있을 뿐 태평양이나 미대륙은 없었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동조한다고 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615년에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종신 자택 연금’형을 선고받고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중세유럽이 몽매했던 시절이었다.

과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바다 끝까지 가면 끝없는 절벽으로 배가 떨어지게 되고 바다 끝까지는 2천 마일 내지 6천 마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서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콜럼버스 는 배를 서쪽으로 계속 타고 나가면 ‘길이 금으로 덮인’ 중국과 인도에 도착하게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열심히 지리 서적들을 읽었었다고는 하나 그의 확신은 호기심과 탐욕에 바탕을 둔 결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동생 Bartolomeo와 함께 ‘Enterprise of Indies’를 창업하고 투자자들을 찾아 명함을 돌리고 다녔으나 하나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Think Big!’으로 작전을 바꾸어 우선 포르투갈의 John 왕을 찾아갔다. 전문가들과 상의해본 끝에 콜럼버스의 제안을 거부한 John왕은 결국 1488년에 포르투갈의 배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다녀오도록 하였다.

콜럼버스 는 ‘큰손’으로 소문이 난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을 찾아갔다. 역시 전문가들과 상의한 결과 이 모험은 너무 비용이 많이 들것임으로 국비로도 담당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이사벨라는 6년이나 시간을 끌며 고민하였다.

기다림에 지친 콜럼버스 는 불란서 왕을 찾기로 결정하고 스페인을 뜨려고 하던 차에 여장부 이사벨라 가 자신의 보물 등을 판 돈으로 투자하기로 마음먹고 콜럼버스를 불렀다. 이사벨라 는 콜럼버스 가 요구한대로 그에게 해군제독, 무슨무슨 총독 등 큼지막한 벼슬을 내려주고 항해에서 나오는 수입의 10%를 주기로 하고 산타 마리아호를 모선으로 하는 세척의 배와 선원 및 보급물자를 조달해 주어서 콜럼버스는 1492년 8월3일에 스페인을 떠난다.


신선한 육류를 먹기 위하여 대지와 큰 거북이들을 가지고 갔으나 36일간의 항해 중 선원들이 채소를 전혀 먹지 못하여 괴혈병 (scurvy)이 생기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콜럼버스의 탁월한 항해술 때문에 서풍을 맞아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 듯이 항해하였으나 선원들의 불평이 높아져 반란의 기세가 등등해지자 그는 항해일지를 조작해 배가 육지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해가며 선원들을 달래었다. 선원들의 불평이 극도에 달한 10월 9일에 콜럼버스는 만일 앞으로 3일안에 육지가 발견되지 않으면 배를 돌리겠다고 선원들과 약속했는데 그때에 새들이 나뭇잎사귀를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고 콜럼버스는 육지가 근처에 있을 것을 감지했다고 한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 두시에 하얀 절벽을 가지고 있는 섬을 발견하고는 그 섬을 San Salvador (Holy Savior)이라고 명명한다. 드디어 콜럼버스 가 “실수로” 미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배를 정착하고 오늘날의 Bahamas 근처를 순항하면서 그가 일본이라고 착각했던 쿠바를 발견하고 또 아이티를 발견한 후 그곳을 Espanola(Spain) 이라고 명명했다.

‘산타 마리아’호가 그곳에서 파선되자 배를 고친 후 그곳에 요새를 구축하고 선원 40명을 남겨놓고 1493년 3월15일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이사벨라로부터 영웅의 환대를 받은 콜럼버스는 아들들이 왕궁에서 일하게 되는 등 환대는 받았으나 항해에서 가지고온 보물들이 없어서 큰 수입은 없었던 듯하다.

그 후 세 번 더 남미로 항해를 한 콜럼버스는 후에 Spanish Conquistador들처럼 금은보화를 약탈해 오는 식의 횡재는 전혀 없었고 마지막 항해년도인 1504년에는 그를 인정해주던 이사벨라 여왕이 사망한 해였던 탓에 그 후 1506년에 친구들도 다 없어지고 외로운 생활을 하다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영웅답지 않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캐리비안 섬들이 중국, 인도, 일본 등의 전초지들이었다라고 생각하였다 한다. 다만 그가 그런 나라들의 원주민들을 직접 만나보지 못했을 뿐이라고. 콜럼버스가 당초에 계획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일확천금을 획득했든지 못했던지, 또 예정하고 갈망했던 목적지에 도달했던지 못했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유럽인들이 새 대륙으로 홍수처럼 몰려올 수 있는 통로를 뚫어놓았다.

독자들에게 하나의 질문을 드리고 싶다. 콜럼버스는 영웅이었을까? 돈키호테이었을까? 혹 영웅적 돈키호테이었을까? 돈키호테적 영웅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영웅 콜럼버스는 최소한 미대륙이 그의 이름을 따라 콜럼버스라고 불리는 영예라도 얻었어야 공평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새 대륙은 왜 ‘America’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콜럼버스 이후로 미대륙을 두 번 다녀온 Florence의 선장 아메리고 베스푸치 는 글재주가 조금 있었던 사람이었던지 그 자신이 “신대륙” 이라고 부른 미대륙에 대해 소상하게 적은 글을 발표하였다. 1507년에 불란서에서 제작된 세계지도에 이 새 대륙을 Amerigo의 여성형 명칭인 ‘America’라고 임시로 적어 놓았다. 그 다음번 세계지도를 제작할 때에 임시이름 ‘America’를 수정하려 했으나 이미 너무 많이 알려져 버려서 고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독도는 우리 땅’이요 ‘East Sea’가 한국말로는 ‘동해’ 라는 구호를 목소리 높여 세계에 방송하고 다녀야 하는 이유도 이런 데에 있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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