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눈보라 뚫고 걷는 행렬은 한 편의 서사시

2014-03-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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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 정찬열의 산티아고 순례길 2,000리<10·끝>

▶ 2천리 순례길은 나를 만나는 길, 길을 걸으며 많은 것을 깨달아, 떠날 땐 버리고 갈 것에 미련 버려야

눈보라 뚫고 걷는 행렬은 한 편의 서사시

보이는 곳이 온통 꽃 천지다. 숨이 막힌다.

눈보라 뚫고 걷는 행렬은 한 편의 서사시

눈보라 치는 산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순례자들.

▲13일째, 부르고스에서 혼타나까지 29.4km를 걸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진흙탕 길을 걷는데 한 발을 옮겨놓기가 힘이 들었다. 우장을 둘렀지만 비바람 치는 벌판을 건너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장이 바람에 찢겨나가고 방수가 되지 않은 신발은 물이 질컥거렸다. 춥고 배가 고팠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비오는 들판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걷는 사람은 자전거를 들쳐 메고 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한결 나았다. 진흙으로 범벅된 자전거를 메고 흙탕길을 빠져나가는 모습은 보기에도 안쓰러웠다.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말없이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인간의 행렬은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였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저 고생을 하며 이 길을 걷고 있을까. 나는 또 무엇을 위해 이 길을 가고 있는가.

▲22일째, 엘 간소에서 엘아세브로 가는 길은 순례 여정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1,500m 고지가 있다.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사람들이 둘씩 셋씩 무리지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 중턱쯤 오르자 금작화가 만발했다.


그때,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꽃은 꽃대로 피고 눈은 눈대로 내려, 꽃 위로 눈꽃이 쌓였다. 꽃과 눈이 어울려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눈발이 거세고, 바람이 몰아쳤다. 질척이는 길을 순례자들이 모자를 눌러쓰고 앞만 보며 걷는다. 안개가 몰려와 시야를 가리더니 어느새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에 쓸리며, 순례자들이 걸어가고 있다.

눈보라치는 길 가운데 십자가가 높이 서 있다. 먼저 도착한 아내가 철십자가 밑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다. 무슨 기도를 했을까, 친구의 부탁도 받아 왔으니 아마 그것들까지도 모두 십자가 앞에서 털어놓았을 터이다. 이 엄숙한 의식을 끝내고 다시 눈보라 속을 헤쳐 묵묵히 걸어간다. 걷는 것만이 존재 이유라는 듯 줄을 지어 걷고 있다.

▲23일째. 아세브로에서 산을 내려가는 길은 꽃 천지였다. 노랗게 핀 금작화, 싸리꽃 닮은 흰 꽃이 온 산을 덮었다. 산 넘어 산, 또 산 넘어 산까지 보이는 곳은 온통 꽃 천지다. 숨이 막힌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이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물,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주 하느님 크시도다’는 찬미의 노래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아주머니가 꽃 세상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남아공에서 왔다고 했다. 꽃보다 사람이다. 산천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풍경 속에 사람이 있어 비로소 그림이 완성된다.

▲2,000리 순례길에서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길은 사람이 만들고, 사람은 길이 만든다”는 사실이다.

카카베로스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침 7시30분에 숙소를 떠나 길가 작은 식당에서 아침을 먹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떠나려 하는데 주인이 문밖까지 나와 와인 한 병을 선물로 주었다. 아침 손님 몇 분께 특별히 드리는 선물이니 가져가 잘 마시라기에 엉겁결에 감사하다며 받았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되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지금 배낭을 지고 걸어가는 순례자였다. 짐을 줄이기 위해 로션까지 버려가며 걷는 처지에 이 무거운 와인을 짊어지고 가다니. 오늘 걸어야 할 거리가 30km가 넘는 먼 길이 아닌가.

배낭은 가벼울수록 좋다. 그래서 전문 산악인들은 짐을 꾸릴 때 칫솔 손잡이를 반으로 잘라내어 무게를 줄인다고 하지 않던가.

사정을 얘기하고 주인에게 반환하고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처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아내가 선물을 준 사람에게 되돌려줄 수가 있느냐며 자기가 짊어지고 가겠다고 병을 달라고 한다.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달라느니 안 된다느니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면서 함께 걷던 일행도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선물로 받은 와인 한 병이 아침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어버렸다.

애물단지가 된 와인 병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신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를 들었다 놓았다 시험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짜선물이라고 덥석 받아드는 내 모습을 신은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저녁 한 때 한 잔의 즐거움을 위해 무거운 와인을 안고 끙끙대며 언덕길을 올라가는 이 미련한 사람. 이놈아, 네 주제를 알아야지! 공짜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에라이 덜 된 녀석 같으니라고!생각할수록 얼굴이 뜨거워왔다. 내 살아온 인생에서 분수를 모르고 설쳤던 때가 언제였을까. 진정한 노력 없이 무엇을 바랐던 적은 없었는가. 내 속에 있는 나를 불러내 따지듯 묻고 또 물었다.

한 시간쯤 걸어가다가 텃밭에 나와 있는 농부를 만났다. 여차여차하여 와인 한 병을 얻었는데 필요하면 드리겠노라 했더니 반갑게 받는다. 농부에게 와인 병을 건네주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도 몸도 편안해졌다.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한국인 두 분이 기억에 남는다.

한 분은 카카베로스에서 만났던 박명철씨다. 모 대학 의대 교수인데 안식년이라고 했다. 며칠을 함께 걸었는데, 어느 날 불쑥 “나는 이 길을 걸으면서 고상한 생각 대신 왜 그리 잡스런 생각만 떠오르는지 모르겠다”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 분의 말이 오래 가슴에 남았다. 진실로 겸손한 분이었다.

또 한 분은 국회의원을 지냈다는 분이다. 명함을 보니 정치학 박사, 전직 대한민국 국회의원 ○○○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前)에 기대어 사는 사람인가. 이 길을 걸으면서 진로를 결정하고 싶다는, 딸 또래의 여자아이와 동행하고 있었다. 본인을 밝히지나 말든지...

산티아고 순례길은 진정한 나를 만나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만난 각양각색의 사람들, 때로는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까지도 내 안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했다. 그들이 모두 위대한 스승이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을 잡자” 꿈과 이상을 향해 노력하는 인간 의지의 위대함을 묘사한, 이곳 스페인 태생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에 나온 말이다.

산티아고 길은 천년 순례길이자, 불굴의 의지로 끝없이 도전하는 ‘돈키호테’의 정신이 흐르는 길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를 여기서 마칩니다.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제 블로그 ‘blog.naver.com/jungchan10’에 들어와 보시기 바랍니다. 귀한 지면을 허락해 주신 한국일보, 그동안 격려하고 성원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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