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두 권의 책

2014-03-01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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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선옥 / 자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맞은 대학 교양국어 시간에 허영자 교수님은 책 두 권을 추천하며 읽게 하셨다. 심복이란 중국 사람이 쓴 ‘부생육기’와 김남조 시인이 쓴 에세이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허영자 교수님은 헝클어진 긴 머리도 신경 쓰지 않고 옷차림에도 무신경한 듯한 모습으로 봄바람 속을 걸으시곤 했다.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청파언덕을 오르내리며 골똘한 생각에 사로잡혀 주변을 바라보지 않는 듯 해 보였다.

김남조 교수님은 어쩐 일인지 항상 강의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쳤다. 근엄한 표정에 발목까지 닿는 긴 검은 치마를 언제나 단정하게 입고 계셨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최고의 조각가 아내였지만 언제나 검소하고 소박한 모습이었다. 성직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교수님이 어려워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뒤편으로 물러서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던 기억이 있다.


교수님의 추천대로, 참고서 이외에 내 돈을 들여서 최초로 산 책이 위의 에세이 두 권이었다. ‘부생육기’의 저자 심복은 중국 강서성에서 1763년에 태어난 사람이다. 하급관리를 하다가 장사를 하던 사람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한 남자의 사소하지만 아름답고 운치있는 일상을 그린 책이 ‘부생육기’이다. ‘덧없는 인생은 꿈만 같아, 즐거움을 얼마나 누리리’라는 이백의 싯귀에서 따온 제목이다.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꿈인 듯 아득하기만 한, 생의 짧은 즐거움과 끝없는 슬픔을 담담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강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남녀유별의 유교문화는 아랑곳없이 부부가 마치 친구처럼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의논하고 같은 취미를 가지면서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남녀유별이 뚜렷한 장소를 갈 때는 남장도 불사하며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는 둘의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다정해 보였다.

심복의 아내 운이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 일상의 사물들을 재치있게 이야기 할 줄 알고 문학과 미술을 진지하게 감상할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그려져 있다. 막연히 운이와 같은 멋진 아내가 되고 싶은 소망을 그때 가졌었다. 먼 옛날 중국의 무명작가가 단 한 권의 자전적 에세이를 썼지만 지금까지도 계속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은총과 고독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김남조 선생님의 에세이는 모두 읽었다. 시집도 물론 읽었다. 정말 닮고 싶은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김남조 선생님이시다. 고통 속에서도 소망이 있음을 일깨워 독자들을 위로하시는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금세 마음이 환해졌다. 가진 것 없지만 뿌듯한 존재감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다. 인생은 허투루 사는 것이 아니라며 경건한 삶, 겸손, 절제, 자기를 태워서 세상을 밝히는 촛불 같은 사랑을 일깨웠다.

독자를 향한 김남조 선생님의 간절한 속삭임이 인생의 고비마다 도움이 되었다. 절망 속에서도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기운을 얻었으며 소망을 꿈꾸며 살았다. 되돌아보면 크리스천이 된 것도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은 덕분인 것 같다. 아직도, 아직도 가야 할 머나먼 길이 있다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이다. 정말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숙제이다.

독자를 향한 진솔하고 진정성 있는 에세이는 그 힘이 얼마나 큰지 지금도 그 두 권의 책이 내 마음 속에 화인이 되어 나를 일깨우곤 한다. 그 때는 큰 기대를 품지 않고 읽었던 그 글들이 내 인생의 중심에서 지금도 나를 이끄는 큰 기둥이 되어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책과의 만남도 한 사람의 일생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알았다.

독서라면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등 그렇게 호흡이 길고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읽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처럼 진실하고 소박한 에세이가 나의 삶의 길잡이가 되었음을 반평생을 보낸 지금 알게 되었다. 여전히 독서는 나의 즐거움이자 결코 빼앗기고 싶지 않은 은밀한 기쁨이다. 그 시간만큼 행복한 시간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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