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의 선물

2013-11-23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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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식 내과의사

가을이 깊어질수록 집 앞 단풍나무 잎들의 색깔이 알록달록함을 더해간다. 알록달록한 이파리들이 아침햇살을 반짝이며 나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옆 마당 감나무에는 진홍빛 감이 탐스럽게 열렸다.

경이롭도록 아름다운 색깔들이 나의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게 한다. 여유 없이 달려온 나의 삶을 돌아보며, 감사의 순간순간들이 모여 오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 감사의 열매를 맺기 위해 지난여름은 그렇게도 뜨거웠었고 우리의 삶은 그다지도 치열했던가? 가을이 깊어질수록 날씨가 차가워지면서 병원에는 환자가 많아진다.

입원 병동에 있는 환자들의 병명도 단풍 색깔만큼이나 다양하다. 갖가지 다른 병을 가진 환자들의 한결같은 소원은 건강을 회복하여 가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하지만 회복되기 전 병원에 있는 동안에는 제각기 다른 소박한 바람들이 있다.


병원 가운만 걸치고 있는 환자들은 대부분 아름다운 옷을 입고 구두소리를 내며 걷는 사람들을 무척 부러워한다. 나도 환자로 누워 있었을 때, 병원을 나가면 멋있게 걸어보아야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대장 또는 맹장수술을 하고 누워있는 환자의 기다림은 방귀를 실컷 뀌는 것이다. 대변을 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 심장수술을 하고 누워있는 사람은 아픈 가슴뼈의 통증이 사그라 들어 실컷 웃어보고 싶은 심정을 하트모양의 벼개로 누르고 있다. 전립선 환자는 시원하게 소변을 보고 싶어 한다. 소변이 안 나와 발을 동동거리다 병원응급실로 오시는 분들도 많다.

내가 자주 대하는 신장 투석환자들은 콩팥기능이 떨어져 소변량이 줄어든 분들이다. 따라서 투석환자들은 물이나 수박 등 수분 많은 음식을 많이 먹게 되면 허파에 물이 차서 호흡곤란을 겪는다. 이분들의 소원은 마음껏 물을 마셔보는 것이다. 또 혈관에 바늘을 찔러 넣고 투석하는 것을 면할 수 있는 신장이식의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당뇨환자들의 바람은 가족들 눈치 안보고 스스로도 죄책감 없이 맛있는 케이크를 마음껏 먹어보는 것이다. 혈관이 안 좋은 사람은 기름에 튀긴 음식을 먹고 싶어 하고, 혈압이 높은 사람은 소금 간이 짭짤한 음식을 먹어본다면 부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관절환자는 지팡이 없이, 통증 없이 걸어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머리 수술 하신 분은 가려운 머리를 언제나 시원하게 감을 수 있느냐고 의사에게 묻는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분은 며칠 동안 잠을 못자서 죽을 것 같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살아계신다.

여러 종류의 암으로 투병하는 환자들은 속이 울렁거리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 불편한 정도가 배 멀미와는 비교도 안 된다고 한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대소변을 보고, 세수를 하거나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고, 걷거나 차를 타고 일하러 갔다면 우리는 위의 많은 환자들의 소원을 이미 이룬 것이다. 더 나가서 커피를 마시고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일을 하면서 때로 의견차이로 다투기도 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하지만 일을 마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대단히 많은 것을 성취한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피곤해서 쓰러져 잠에 곯아 떨어졌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람의 대부분을 이룬 것이다. 우리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진 않았어도,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위의 환자들이 바라던 소원의 몇 가지는 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삶에 주렁주렁 달린 감사의 열매를 생각하지 않고 일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온 나 자신을 반성해본다. 단순한 일상을 눈물겹도록 기다리며 소원하는 분들 앞에서 더욱 겸손해져야 할 것 같다. 그런 분들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걸음걸이조차도 조심하여 사뿐히 걷고, 말도 조용히 차분하게 하여야 될 것이다.

평범한 일상조차도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조물주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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