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청정해역

2013-06-18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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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하고 남자하고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있다네
하루 종일 아무 짓도 안하고
물미역 같은 서로의 마음 안쪽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다네
너무 맑아서
바다 속 깊이를 모르는
이곳 연인들은 저렇게

가까이 있는 손을 잡는 데만
평생이 걸린다네
아니네, 함께 앉아
저렇게 수평선만 바라보아도
그 먼 바다에서는
멸치떼 같은 아이들이 태어나
떼지어 떼지어 몰려다닌다네

이덕규 (1961-) ‘청정해역’ 전문


강남역 지하철역, 비상시 사용하는 유리문에 쓰여 있는 시이다. 이 한 편의 시는 아련한 바다냄새를 지구상에서 제일 복잡하다는 강남역에 풀어놓고 있다. 햇살이 온종일 빛나고 파도 소리가 들리고 물새들이 끼룩끼룩 나는 청정해역, 물미역처럼 서로의 마음을 더듬으며 욕망 없는 욕망으로 빛나는 천국. 지하철 유리문 속에 갇혀 온종일 처얼썩 처얼썩 출렁이고 있다. 이미 비상이 걸린 지 오래인 우리 영혼을 위해.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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