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크라이슬러의 오판

2013-06-07 (금)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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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락 부국장·경제부장

2009년 8월28일 오후 남가주 125번 도로를 달리던 한 렉서스 차량에서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CHP)에 긴급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

당시 샌디에고 인근에서 현직 경관이 운전하던 이 차량은 가속 페달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액셀레이터에서 발을 뗐는데도 불구하고 시속 100마일이 훨씬 넘는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그리고 탑승자 중 한 명이 엄청난 공포 속에 외친 다급한 절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충돌음을 전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 차 안에 탑승하고 있던 일가족 4명이 모두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세상에 공개된 사고 직전 통화 내용은 세계 최대, 최고를 자부하던 도요타가 사상 최대 규모의 리콜사태를 불러오게 한 전주곡이었다. 도요타는 가속페달 문제로 인해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1,200만 대가 넘는 차량을 리콜해야 했고, 자동차 1위 자리를 내주었다. 또 최고 경영자가 워싱턴 DC까지 날아와 연방의회 청문회에서 머리를 숙여야 했다.


가속페달 결함은 이미 여러 번 제기됐었지만, 도요타가 이를 무시했다는 의혹까지 받으면서 이 회사에 대한 신뢰는 땅으로 추락했다. 이 회사가 이를 회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음은 물론이다.

미국에서 리콜은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소비자의 생명이나 건강, 사용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면 곧바로 취해지는 조치다. 특히 도요타 리콜 사태는 자동차 업계는 물론, 식품 등 다른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기업들은 작은 문제 가능성만 있어도 적극적인 리콜에 나서게 됐다.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현대 기아차는 지난 봄 300만 대에 이르는 리콜을 단행했고, 가깝게는 며칠 전 CJ 푸드가 한국에서 발견된 고추장 용기 결함을 이유로 타운 내 마켓 매장의 제품들을 모두 회수했다.

‘꼼수’를 부렸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신뢰 회복이 쉽지 않고, 엄청난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도요타 학습효과’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다.

최근 크라이슬러가 자동차 결함이 확인된 270만대의 차량에 대한 도로교통안전국(NHTSA)의 요구를 거부해 파장이 일고 있다. 크라이슬러는 연료 탱크 위치 등 디자인이 잘못돼 후미 충돌 시 고장은 물론, 화재 가능성이 있다는 당국의 지적과 함께 54명이 사망한 사례 제시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고 있다.

크라이슬러가 보인 의외의 반응에 주류언론들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대표적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아예 “크라이슬러가 브랜드를 자살시키려 한다”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이 회사는 한 때 GM, 포드 등과 함께 미국 자동차 시장을 이끌었던 ‘빅3’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70년 대 미국을 강타한 ‘오일 쇼크’라는 직격탄에 존립 자체가 흔들거렸다. 다행히 리 아이아코카라는 걸출한 경영자를 만나면서 만성적자의 위기를 극복,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던 기업이 바로 크라이슬러다.


그동안 합병 등 우여곡절을 겪은 크라이슬러는 지난 해 17억 달러의 순수익을 기록했다. 전년 수익이 1억8,300만 달러였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10배나 늘어난 셈이다. 어려운 경제 환경에서 흑자를 내고 있는 크라이슬러가 자신들의 주장을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동안의 전례들을 보면 정부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할 수 있는 간 큰 회사들은 없기 때문이다.

시간을 끌수록 손해를 보는 것은 결국 크라이슬러다. 소비자들의 따가운 눈총을 넘어 신뢰를 잃을 수 있다. 그리고 잃은 신뢰를 회복하려면 리콜로 인한 비용부담 보다 더 큰돈을 쏟아 부어야 한다.

크라이슬러는 NHTSA에 18일까지 리콜 여부에 답을 해주어야 한다. 시간은 흘러가고, 그 만큼 신뢰와 평가도 내려가고 있다. 신속한 리콜은 소비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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