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일
2013-06-06 (목) 12:00:00
그 여름 밤 길
수풀 헤치며 듣던
어질머리 풀냄새 벌레소릴
발목에 와 서걱이던 이슬방울 그리워요
우리는 두 마리 철없는 노루 새끼처럼
몸 달아, 하아 몸은 달아
비에 씻긴 산길만 헤어져 다니고요
단숨만 들여 마시고요
안 그런 척 팔만 한 번씩 닿아보고요
안 그런 척 몸 가까이 냄새만 설핏 맡아보고요
캄캄 어둠 속에 올려 묶은 머리채 아래로
그대 목덜미 맨살은 투명하게 빛났어요
생채기투성이 내 손도 아름다웠지요
고개 넘고 넘어
그대네 동네 뒷 산길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
우리는 숫기 없이 꿈 덜 깬 두 산짐승
손도 한번 못 잡아본걸요
되짚어오는 길엔
고래고래 소리 질러 노래만 불렀던걸요
김사인(1955-) ‘옛일’ 전문
한여름 밤 소년과 소녀가 산길을 간다. 풀벌레 우는 수풀을 헤치며 두 마리 노루처럼 밤길을 간다. 발길에 차이는 이슬방울들, 소녀의 목덜미는 달빛에 빛나고 막일로 거칠어진 소년의 상처투성이 손조차 아름다운 밤길이다. 소녀의 손 한 번 잡지 못한 채 산길을 되짚어 홀로 돌아온 소년. 그는 추억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더욱 뜨거웠던 산길. 돌이켜 마냥 그리워지는 순정한 옛일을.
임혜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