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의 점령지에서

2013-04-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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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 순 태 <카라미션 운영위원장>

금년 봄은 많이 어수선하였습니다. 4월이면 분명히 봄의 계절인데 이상기온 탓인지 날씨가 잘 풀리지 않고 늦추위와 때 아닌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는 곳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 마당어귀에 있는 어린 벚꽃나무가 부지런히 꽃망울을 틔웠다가 몰아닥친 찬비에 떨다가 만개의 절정도 없이 지고 말았습니다.

어디 계절뿐인가! 북한의 전쟁위협으로 세계가 어수선하던 판에 보스턴의 마라톤 현장에서 일어난 폭발물 테러사건이 미국뿐만이 아니고 세계를 다시 테러 경계로 얼어붙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그친 게 아니라 범인으로 지목된 형제의 무차별 총격으로 체포과정에서 경관들이 희생되고 보스턴 시가지가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게다가 그 사이에 미국 텍사스주 웨스트의 비료공장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나 14명이 숨지고 200여명이 다치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뿐입니까. 중국의 남서부 쓰촨성에서 일어난 7.0도의 지진으로 사망·실종이 200여명이 넘고 부상자가 1만여명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정말 금년 4월은 너무 “진인한 달”이었고, 봄은 “시절이 하수상하여 올동말동하여라”이었습니다. 계절의 기온이 봄의 도래를 어렵게 하였고, 각종 사건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봄을 맞이할 여유를 가지기 힘들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봄은 왔습니다. 아무리 계절 기온이 변덕을 부려도, 세상일들이 하수상하여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 것입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오리건주와 워싱턴주가 만나는 곳, 밴쿠버시는 마치 밤하늘에 불꽃이 터지듯이 천지에 꽃들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오래 자란 벚꽃나무들이 한 차례 폭발하였고, 뒤이어 튤립과 철쭉꽃들이 마을 곳곳의 지면을 찬란하게 접수하여 버렸습니다.

하늘 높이 솟아 울창한 침엽수의 검은 숲에도 키를 비기는 활엽수들이 연초록 잎사귀들을 쏟아내는가 하면, 그 사이 사이로 거대한 꽃나무들이 하얀색, 연분홍색, 진홍색 꽃들을 터뜨려 오리건 주와 워싱턴 주의 숲은 기막힌 색상의 하모니로 봄을 연주해 내고 있습니다.

수상한 시절로 마음이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은 봄의 막무가내 식으로 공략 앞에서 손쉽게 점령당하여 버렸습니다. 진군하여 오는 봄을 막을 군대는 아무 곳에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속수무책으로 봄의 포로가 되고, 저마다 순순히 자기 마음을 봄의 점령지로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봄의 선무공작에 포섭되어 기대하지도 못했던 행복감으로 대취되고 말았습니다.

봄은 어린이들에게 무지갯빛 동화의 세계를 안겨 주고, 젊은이들에게는 꿈과 설렘을 안겨주고, 나이 든 이들에게는 추억으로 미소 짓게 하여 주었습니다. 봄의 점령지에서 이 아름다운 계엄령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 무르익은 봄, 5월이 곧 옵니다. 사람들은 무거운 겨울 외투를 벗듯이 전쟁의 위협을 벗고 싶고, 테러의 공포를 벗고 싶고, 이상기온과 지진의 무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이제는 봄의 시민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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