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생활인의 신앙

2013-04-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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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값이 얼마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제각기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같은 돌이라도 하나는 금강석이 되고, 또 하나는 주어도 버려버리는 돌멩이가 된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 수고 없이 생긴 그대로 있는 것이 길가의 돌멩이요, 수천도의 열과 압력으로 단련되어 이루어진 결정체가 바로 금강석이다. 그렇다면 ‘나’라는 인간은 과연 어느 쪽에 속하는 것일까? 있는 그대로 하루 밥 먹고 살다가는 돌멩이 같은 인생인가? 그렇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는 값진 삶이 담긴 금강석 같은 인생인가? 저마다 한 번씩 생각해 보며 살 일이다.

그런데 값어치는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쌀이 담겨 있으면 쌀자루가 되고 돈이 들어 있으면 돈자루가 된다. 모래를 담으면 모래자루가 되고, 밀이나 보리를 담으면 곡식 부대가 된다.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 쌀자루와 모래자루는 값이 천양지판이다. 금덩이가 가득 들어 있는 황금자루는 몇 대가 편히 살아도 될 만큼 값이 나간다. 그렇다면 분명 ‘나’라는 가치도 내 안에 담겨진 것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닐까?거짓을 담고 있으면 사기꾼이 되고, 탐욕을 담고 있으면 욕심꾸러기가 된다는 말이다. 진실을 담고 있으면 착한 사람이 되고, 근면을 담고 있으면 부지런한 사람이 되듯이 말이다. 지식을 담으면 지식인, 지혜를 담으면 현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값을 매기는 원리다.


언젠가 LA에 오신 서강대학교 전임 총장이셨던 박홍 신부님의 말씀도 이와 같았다. 같은 주전자인데도 물을 담으면 물주전자가 되고, 술을 담으면 술주전자가 된다고 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칼 막스를 담으면 공산주의자가 되고, 부처를 담으면 불교신자, 예수님을 담으면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바로 똑같은 이치다.

똑같은 사람인데도 칼 막스를 담아 무신론자가 되는가 하면, 예수님을 담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니 이 엄청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까? 하나는 영원한 죽음의 영벌이요, 다른 하나는 영생이니 말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예수님’을 내안에 담았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존귀한 ‘하느님 자녀’가 되었으니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황홀한가?그런데도 우리는 살아오면서 너무나도 자신을 망각한 채 건성으로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돈 몇 푼 더 가졌다고 기고만장하는가 하면, 그나마 내세울 것이 없으면 그만 코가 땅에 닿게 풀이 죽어 지내는 것 말이다.

그런 삶을 살다보면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겠다. 크리스천인 우리가 백조인데도 오리 새끼처럼 움츠려 지내는 경우마저 비일비재하기에 말이다. 진정 소중한 내 인생의 행복과 가치가 아침 이슬처럼 언젠가는 사라질 세상 것들에 좌우된다고 생각하며 산다면 얼마나 가련한 운명인가.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은 줄 수 없다. 가진 것이 돈밖에 없으면 돈밖에 줄 수 없고, 주먹밖에 가진 것이 없으면 주먹밖에 줄 수 없다. 거짓밖에 가진 것이 없으면 거짓말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 ‘믿음’을 가져야만 긍정적인 삶을 살게 되고 주위에 희망과 비전을 줄 수 있을 것 아닌가. 왜냐하면 가진 것에 따라 각자의 ‘가치’가 결정되어 지겠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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