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액땜

2013-04-1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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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 신 용

바닷바람이 속초 산 속을 휘저었다. 추위에 떠는 겨울 산에는 칼끝 같은 나무들이 산등성이 위로 줄이어 서 있었다. 이른 아침을 먹고 조상 묘를 찾아 나선지 벌써 한시경이 지나 춥고 배가 고프면서 은근히 조상을 탓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내의 얼굴은 성묘의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20년 가까이 아버지께 인사 한 번 드리지 못했으니 말이다. 바람은 예전 그대로인데 강산은 변해 있었다.

아버지의 무덤을 찾지 못하는 아내의 모습은 이제 결사적으로 보였다. 딸을 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산바람 타고 내려 왔나, 딸의 마음이 나무 타고 하늘로 올라갔나, 뒤편 높은 산자락을 따라 아내는 가장 먼저 올랐다. 한참 오가던 중에 아내가 소리를 질렀다. 비석이 있다고 했다. 나도 서둘러 아내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긴긴 세월 비바람에 부대끼며 주인을 지키는 비석이 홀로 외롭게 서 있다. 간단한 비문을 새긴 이름 위로 아버지의 반가운 소리를 들었을까. 딸아, 딸아 어서 오너라. 멀리 미국으로 가며 언제 올까 울며 세운 비석이 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비석을 세우던 날도 그렇게 추웠다. 산으로 나서기 위해 일찍 마련한 아침상 옆에는 곤로에 올려진 매운탕이 소리 내어 끓고 있다. 당시 아내는 임신 7개월이었다. 내가 미국으로 전출되기 전에 비석을 주문하고 세운다니 내심 걱정이다. 함부로 비석을 세운다고 일가들이 말들이 많았다. 몇몇 친지들은 조상이 화내면 무슨 변고가 생긴다고 말렸다.


조용조용 눈치 보며 아침을 먹던 중이었다. 국자에 걸린 국솥이 쓰러지며 끓던 국물이 아내의 다리에 쏟아졌다. 아내의 외마디 비명소리에가 들렸다. 막 퍼 올린 밥과 펄펄 끓는 국사발에서 하얀 김이 방안 가득히 피어올랐다. 재빠르게 응급 처리했지만 넓적다리 살점은 두툼한 겨울 옷 속에서 금세 샤부샤부처럼 익어버렸다.

한참 후 제일 큰 할머니가 “액땜했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에 이쪽저쪽에서 한 마디씩 거든다. 착한 딸은 찢어지는 고통을 참으며 비석을 실은 택시를 타고 바닷길을 지났다. 쓰린 고통을 참으며 묘소로 향해 산길을 올랐다.

주한 미군의 월급이 많지는 않아도 아내는 열심히 저축했다. 그렇게 저축한 돈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비석을 장만하였다. 지금은 아내의 넓적다리 화상 흉터도 비석도 같은 나이를 먹었다. 나는 미국으로 전출되어 왔다. LA에서 휴가를 보내면서 임신 7개월 아내는 건강이 대단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응급치료를 받으러 간 곳이 샌프란시스코이고 그 곳에서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나는 임시로 배속을 받아 그곳에서 제대까지 했다. 미군 부대 중에 최고 좋은 곳에서 근무했다. 아내가 흉터를 입으면서 받은 액땜으로 장인어른께서 보살핀 것이라 여겨진다.

인생에서는 화가 복이 되고 복이 화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전화위복이라고 한다. 최근에 작은 일로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별 것도 아닌데 처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의도한 것과 달리 일이 터져버렸다. 이쪽저쪽 공을 넘기는 동안 가운데서 입장이 난처해져 버렸다. 그리고 보니 한 쪽은 지붕에 올라가 버렸고 한 쪽은 집안에 들어앉은 형국이 되었다.

다행히 사다리를 놓고 내려오라 한다. 손사래를 쳐버리면 안 될 듯싶은 일은 해결되었고 그것은 액땜이 되었다. 액땜이란 앞으로 당할 액운을 미리 겪어 대신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액땜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럴 때 액땜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바람이 조국 산천에서 불고 있다. 가뜩이나 힘든 불경기를 여러 해 보냈다.
조상의 숨결이 깃든 고향의 산과 들에 전쟁을 걱정한다. 봄기운이 가득 찬 푸른 4월이다. 어려운 시절은 바람결에 액땜하듯 지나가고 생명이 움트는 봄바람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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