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사

2013-02-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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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하는 삶

▶ 김 범 수 <치과의사>

두어 달 전 토요일에 오피스 이사를 했다. 같은 코리아타운 내에서 움직이는 것이니 대충 꾸려서 가면 그만이지 무슨 큰일이랴 생각했던 것은 오산. 오전 환자를 마치고 낮 12시부터 시작한 이사는 이삿짐센터의 늠름하고 씩씩한 장정들과 오피스 식구, 간호사들 합쳐서 열두어 명이 부지런히 움직였건만, 어디에 들어 있었는지 크고 작은 짐들이 끝도 없이 꾸역꾸역 나왔다.

마음이 급해도 무슨 소용인가. 아직 반도 안 실었는데 다운타운 쪽으로 뉘엿뉘엿 해가 떨어지나 했더니 갑자기 어두운 하늘에서 빗방울이 뿌리기 시작한다. 환자 차트와 오피스 서류… 조심스레 포장했던 박스들을 무빙 트럭으로 옮겨 싣는 동안 행여 젖을세라 온몸으로 감싸고 뛴다. 미끄러워진 바닥 때문에 아아! 저저! 저기 저기 조심! 서로 소리를 지른다. 빗줄기는 굵어지고 모두들 비에 흠뻑 젖은 채 새 장소에 도착한 것이 밤 9시.

이삿짐센터 일꾼들은 과연 힘이 장사다. 무거워서 꿈쩍도 안하는 박스들을 척척 어깨 위에 두 개씩 얹고 걸어갔다가 내려놓을 때는 자는 아기 다루듯 살며시 제자리를 잡아놓는다. 참 고맙다. 욕심껏 싼 책들과 약품들도 무겁지만 가장 무거운 것은 치과 환자용 유닛 체어. 전통 깊은 미국회사가 만든 이 체어는 하나의 무게가 600파운드 이상이고 어떤 것은 1,000파운드가 나가기도 한다.


“독또르 낌!” 경험 많은 라티노 일꾼대장이 나를 부른다. “이것은 누가 와도 못한다. 네다섯 명이 들면 가능하겠지만 저걸 든 채 한꺼번에 좁은 문을 통과할 수는 없다.” 난감하다. 치과 테크니션에게 비상연락을 했더니 비 오는 주말 밤인데 싫은 기색 없이 달려왔다. “제가 한 번 분해를 해보지요.” 비를 맞으며 문 바깥에 앉아 그가 의자를 분해하기 시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괜히 왔다리갔다리… 박스에 걸려 넘어질 뻔하기나 한다. 나가서 만두를 잔뜩 사왔다. “스낵 먹고 힘냅시다!” 일꾼들을 부른다. 복도에 선 채로 만두를 먹는 일꾼들 얼굴을 하나씩 살펴본다. 참 고맙다.

내가 입을 열었다. “오늘밤에 다 끝내기는 어렵겠습니다. 일단 옮겨 왔으니 앞으로 천천히 정리해 나가면 될 것입니다. 정말 수고들 많았습니다.” 자정이 가까워 우리는 비 내리는 밤길을 되짚어 기진맥진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나는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번엔 바로 다음날로 예정된 단기 선교여행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은 선교지에서 필요로 하는 약품과 치과 진료를 위한 모빌 유닛, 이것 역시 한쪽 어깨가 뻐근하도록 무겁다. 기타 나누어줄 음식과 학용품, 의류와 축구공들, 주변에서 도네이션 해주신 많은 물품들을 이민가방에 꾸려 넣는다. “아빠의 개인 물건은 어디에 싸지요?” 어렸을 때부터 자주 선교여행길에 따라다니던 아들이 짐을 옮기다 말고 걱정스레 묻다가 “오케이. 현지 물품 먼저!” 하고 자기가 먼저 말한다.

하루를 내 힘으로 산 것 같아도 실은 그 안에 안 보이는 여러 사람의 수고가 나를 떠받쳐준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 감사함을 마음에 담았다가 나도 다른 이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줄 수 있으면… 잘 산 것이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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