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2-11-15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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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 고정희(1948 - 1991)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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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도 지나고 추운 계절로 들어섰다. 끝 간 데 모르게 불경기는 깊어지고 봄은 멀어 어디 하나 따뜻한 소식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시로 월동준비를 끝내겠다. 캄캄한 밤에 절망에 빠진 상한 영혼들에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이 시의 따뜻함을 품으면 넉넉히 흔들리며 이 겨울을 건너갈 수 있을 것 같다. 고통도 살 맞대고 친구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김동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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