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스펜에 관한 명상

2012-10-09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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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건 프리먼과 잭 니콜슨이 주 인공으로 나오는 ‘버킷 리스트’ 라는 영화가 있다. 불치병에 걸 린 두 노인이 병원에서 우연히 만나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 을 모두 해보기로 약속하고 함 께 세계 여행을 떠난다‘. 버킷 위 에 올라 목을 매달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이라는 의 미에서 ‘버킷 리스트’라는 이름 이 붙었다.

이들이 적은 ‘버킷 리스트’에 는 스카이다이빙, 카 레이스, 문 신하기, ‘가장 아름다운 여성과 키스하기’ ,‘ 정말 웅장한 것 보 기’ 등등이 적혀 있는데 정말 이 들은 죽기 전에 그 대부분을 실 천하고 눈을 감는다. 이 영화 덕 인지는 모르지만 요즘 ‘죽기 전 에 해야 할 일 몇 가지’‘ 죽기 전 에 가 봐야 할 곳 몇 군데’ 식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리스트는 사람마다 다르겠 지만 미국에 살고 있는 한인이라 면 죽기 전에 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맑은 가을 날 아스펜 숲 걸어 보기’가 그것이 다. 사시나무과에 속하는 아스펜 은 9월이 되면 노랗게 물들다 9 월 말에서 10월 초로 접어들면 진하디 진한 황금빛으로 변한다.


아침이나 저녁 무렵 노란 햇살 을 받으며 수천, 수억 개의 아스 펜 잎이 춤추는 장면은 장관이 다. 바람이 불면 아스펜은 ‘사시 나무 떨 듯 떨며’ 맑은 소리를 내 며 황금 동전의 눈보라를 선사하 기도 한다. 동방 정교가 주류인 슬라브 문화권에서는 예수를 배 반한 유다가 이 나무에 목을 매 죽었기 때문에 나무가 겁에 질 려 이처럼 떤다고 한다. 악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는 이 나무로 창을 만들면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다는 전설도 있다. 인디언들 은 이 나무껍질을 소염제와 진통 제로 쓰기도 했다.

아스펜은 특이한 나무다. 개성 이 강해 물드는 시기가 제 각각 이다. 같은 동네에서도 앞산은 노 랗게 단풍이 졌는데 뒷산은 아직 도 파랗고 옆 산은 아예 잎이 다 떨어진 곳도 있다. 같은 동네가 아니라, 같은 산언덕, 심지어는 같 은 나무 안에서도 파랑과 노랑이 제멋대로 섞여 있다. 수명도 100 년 남짓으로 수 천 년씩 사는 다 른 나무에 비하면 짧은 편이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은 실상과 는 조금 다르다. 지상에서는 따 로따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땅 밑 뿌리는 서로 얽혀 있다. 한 아스 펜 군락지에 자라고 있는 아스 펜 나무는 알고 보면 한 생명체 다.‘ 다양성에서 하나로’ (E Pluribus Unum)를 모토로 내건 미국 의 이념과도 맞는다.

산불이 나 다른 나무들이 다 타죽어도 아스펜은 끄떡없다. 뿌 리만 살아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솟아나기 때문이다. 다른 나무 그늘 밑에서는 자라지 못하는 아 스펜에게 산불은 오히려 고마운 존재다. 이처럼 끈질긴 생명력 덕 에 아스펜의 실질 수명은 몹시 길다. 유타에 있는‘ 판도’라는 한 아스펜 자생지는 8만 년 동안 존 재해 오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 다. 지구상에 이보다 오래 사는 생명체는 없다.

중가주 비숍에도 아스펜 숲이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보려면 콜 로라도로 가야 한다. 비숍과 콜 로라도의 아스펜 규모를 비교하 자면 새우와 고래 정도 될 것이 다. 콜로라도 전역에 널려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아스펜이 많이 자라 동네 이름을‘ 아스펜’ 이라 지은 아스펜이야말로 아스 펜의 성지다.

한 때 은광촌으로 번성했다 폐 허가 됐던 이곳은 70년대 존 덴 버 등 가수가 모여 살면서 반문 화 중심지로 떴으며 그 후 스키 리조트로 부활하면서 지금은 매 매 주택의 중간가가 420만 달러 를 웃돌 정도로 미국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곳이다. 아스펜의 아름 다움을 감상하기 위해 이곳에 집 을 살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다.

아스펜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는 9월 말에서 10월초로 매 우 짧다.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 내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제각 각인 것 같지만 뿌리로 서로 연 결돼 하나이고, 약한듯 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아스펜은 어찌 보면 생명과 세계의 훌륭 한 메타포다. 올해가 아니라면 죽 기 전에 한 번은, 아스펜 숲이 선 사하는 빛과 소리의 향연을 감 상해 보자.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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