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꼿꼿이 꿋꿋이

2012-07-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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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전문가용 카메라 장비 일습을 가진 적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사진에 몰입하여 고상한 취미활동을 하였냐 하면 절대 아니다. 의사보다 백배나 바쁜 사진작가 친구의 꼬임에 잠시 넘어갔을 뿐이다. 그의 얼굴은 항상 밝다. 그가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주로 으와! 크아! 등의 감탄사로서 모하비 사막으로 지는 저녁 해라든지 뉴칼레도니아를 흐르는 리버 블루가 마치 눈앞에 펼쳐진 듯한 순간들의 고양된 흥분이 삶에 늘 배어 있다.

마음이 지친 날, 나는 그 친구를 떠올린다. 최근의 촬영 여행담과 오가는 길목에서 만난 기인들의 에피소드, 귀여운 과장이 가미된 뷰파인더 안의 세상이야기를 듣다보면 내 입에서도 결국 으와! 크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며 살맛나는 세상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야기 끝에 하루는 그가 진심어린 권고를 해왔다. “직접 찍어보지 그래? 다음 여행에 불러줄게.” 고개를 갸우뚱하자 그가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가끔씩은 전문작가들을 위한 모델촬영도 있고. 으와! 크아! 모델들이 정말….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나도 자신에게 투자를 하자. 주말마다 나가자! 자연을 따라 자연의 순리에 나를 맡기고 하늘이 내리신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껴보자!’ 새로운 취미세계로 입문하는 자의 희망찬 기대감에 몸을 떨며 나는 친구에게 카메라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애들 장난감처럼 굴러다니는 디지털 카메라도 아니요, 스마트폰에 달려 있는 카메라 기능도 아닌, 진짜 카메라!


얼마 후 카메라 장비들이 도착했다. 아니 이게 뭐야! 커다란 백팩이 넘치도록 여러 가지 물건들이 무겁기는 왜 그리 무겁단 말인가. 친구는 들떠서 설명을 해주는데 카메라도 무섭게 생겼지만 딸려온 망원렌즈라는 물건은 대구경대포 만큼이나 크다. 친구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카메라 전면에 붙어 있는 렌즈를 떼어내고 ‘대포’를 갖다 붙인다.

클릭 클릭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삼각대 위에 설치된 카메라는 거의 무기처럼 보인다. “이리 와서 좀 들여다 보라구! 으와! 크아! 정말 멋있다!” 그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렌즈가 스스스스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데 어디를 봐야 하나 하고 눈을 바짝 들이대보지만 크고 작은 동작버튼과 소수점 찍힌 작은 숫자들…. 나는 무엇이든 복잡하면 질색이다. 자연이고 모델이고 다 싫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딸려온 필름 열두 개 가운데 처음에 넣어준 36장짜리 한 롤도 다 써보지 못하고 무거운 ‘대포’는 몇 년 동안 장롱 한 구석을 차지하다가 누구에겐가 넘겨졌다. 나중에 그 시험용 한 롤을 인화해 보니 초점조차 제대로 맞은 게 없다. 섬세한 카메라는 초보자의 무딘 동작을 감지한 모양이다.

요즘은 이같은 소위 손떨림 방지를 위한 기능들이 부착되어 있다고 한다. 전자식 혹은 렌즈 시프트 방식이라는 자이로(gyro) 센서의 사용이다. 카메라가 움직이면 반대 방향으로 렌즈를 움직여서 흔들림이 상쇄된다. 흔들어도 넘어뜨려도 중심만은 제자리를 지키는….

여행객의 섣부른 발길이 지나지 않은 인디언 보호구역 내, 햇빛과 들풀과 모래언덕, 그 경이로운 풍광들을 모아 친구는 ‘영혼의 땅’ 이라는 작품집을 만들었다. 그는 여일하다. 아픔을 겪은 후에 오히려 눈이 더 깊어졌다. 내 마음에도 자이로 센서 하나를 달수만 있다면 이 세상을 꼿꼿이 꿋꿋이 흔들림 없이 살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김 범 수 /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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