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2-06-28 (목) 12:00:00
크게 작게
아내는 잠시 뚫어져라
배양접시 위에 분열하는 배아를 본다
한 개가 두 개가 되고 네 개가 되고
사람의 성숙과 욕심은 배수의 성을 가졌다
언제부터 내 아기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아니 언제부터 실패한 탄생에 눈물을 흘려야 하죠
손수건을 꺼내 울어줄 조문객을 부르기엔
태어나 한번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멋 적고 가슴 한 구석에 차지할 슬픔이 없다
남편은 오 대에 걸친 거대한 장손이자
무기력의 정자를 소유한 앙상한 가지다
출근하는 그를 베란다 15층 위에서 내려보다 보면
어기적 꿈틀거리는 시간강사 느린 발걸음이
전자현미경으로 본 그의 정자 행보와 닮았다
기어이 무엇인가를 이세상에 남겨야 하는지
신혼여행 후 식어버린 채 움직임이 없는 금슬
불임클리닉 의사와 펀드메니져는 취미가 같다
동그라미를 늘리며 고객의 들켜버린 꿈을 들춰내는
손버릇 나쁜 아기의 손모가지를 가졌다
가만히 손을 뻗어 남편의 손을 잡으면
가느다란 유리대롱을 통해 꿈틀대는
나약한 정자의 울음소리가 진동한다


- 박상호(1961 - ) ‘아내의 인공수정 일지’ 전문

-------------------------------------------------------------


이 시인의 시를 읽으면 재미있다. 이야기의 한 부분 같기도 하고, 소설을 요약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시 속의 부부는 인공수정에 성공했을까, 실험관 속의 배아 같은 이 부부의 사랑은 시들고 말았을까, 새 생명을 얻었을까. 흥미진진하다. 박상호 시인이 올해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 소설부문에 입상했다는 소식은 그래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소설에 대한 시인의 도전이 ‘나약한 정자’로 그치지 않고 표현의 영역을 바다처럼 넓혀 나가기 바란다.

<김동찬 시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