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 냄비 이야기

2012-06-19 (화) 12:00:00
크게 작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직원 중 한 명의 집에 불이 나서 가재도구가 많이 탔는데, 특별히 부엌에 있는 물건들이 거의 다 타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이메일이 왔다. 새 것도 좋고 사용하던 것도 좋으니 쓸 만한 부엌 용품을 학교에 갖다 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는 친구가 몇 년 전에 주고 간 냄비 하나를 여분으로 갖고 있던 터라, 뽀얀 먼지를 씻어내고 다른 접시들 몇 개랑 같이 해서 학교에 전해주고 왔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냄비가 우리 집에서 나가 다른 집으로 이사 갔다. 보내는 마음이 흐뭇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방에 들어갔는지, 하루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삼십 여분 갖고 나와 보니 거실이 온통 뿌연 먼지로 자욱했고 고약한 냄새가 온 집안을 진동시켰다. 상하지 않도록 한번 데워놓는다고 김치찌개를 불에 얹어 놓고 들어갔는데 그만 깜박한 것이다.


그 많던 김치찌개가 시꺼멓게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냄비 밑바닥이 아예 떨어져서 전기 레인지에 들어붙어 녹을 지경이 되었으니 사태가 참으로 심각했다. 생선 한 마리만 구워도 신경질적으로 울려 대는 화재경보기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건전지를 빼놓은 탓에, 아무런 신호음도 듣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 날 아침 내 정신이 소풍을 간 모양이다. 나는 19년이나 함께했던, 한 쪽 손잡이가 떨어진 낡은 냄비를 우리 집에서 내보내야 했다. 그 동안 함께해 주어서 고맙기도 했고 처참한 모습으로 보내게 되어 많이 미안하기도 했다.

한꺼번에 두 개의 냄비를 보내고 나서 오늘 나는 그 자리를 대신할 냄비를 하나 샀다. 결혼한 이후로 처음 장만하는 냄비였다. 우리 집에 있는 냄비들은 모두 은색인데, 이번에는 예쁜 빨간색 냄비를 골랐다.
이렇게 해서 일주일 동안 냄비 세 개가 우리 집에서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했다. 내 마음도 함께.


민소란 / 한국학교 교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