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년 계획

2012-01-11 (수)
크게 작게

▶ ■ 나눔의 행복

새해가 되면 거의 누구나 한 가지, 또는 사람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곤 합니다. 그 계획이 우리를 실망시키는 정치가들의 선거공약처럼 허망한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그것을 세우는 순간만큼은 그렇게 야심찰 수가 없습니다.

어떤 친구는 10년 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신년 금연, 죽음 불사”라고 훈련소 신병들처럼 외쳤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그 구호를 처절하게 외치고 있고, 매번 시간 약속을 잊어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곤 하는 다른 친구 녀석은 신년마다 약속을 기록하기 위해 휴대용 수첩을 장만하지만 연말이 되면 석장도 채 채우지 못한 채 버리는 일을 아직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새해 계획이란 밥상 위에 단골 메뉴로 오르는 다이어트라는 놈은 이제 친근하다 못해 약간은 징그럽기까지 합니다.


참으로 작심삼일도 영광스러운 것이 신년계획입니다. 그러나 비록 삼일 내에 무산되다 해도 우리에게 항상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신년계획이 자신의 취약한 부분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며, 극복에 대한 의지이며, 성취를 향한 소박한 희망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난 1월1일 저녁 식사 중 가족끼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각자의 신년계획에 대해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족 내 권력순위는 대학 마지막 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통학하며 눈칫밥(?)을 먹고 있다는 이유로 큰 딸아이가 4위, 수시로 출장을 다니기에 중요한 가족행사 빼먹기가 다반사인 제가 가장이라는 거창한 지위에도 불구하고 3위, 아직은 권력을 행사하기에는 역부족인 고등학생이지만 호시탐탐 상승을 노리는 둘째 딸아이가 2위, 그리고는 결혼한 지 몇 년만에 장악한 절대권좌를 지금까지 굳건히 굳게 지키고 있는 집사람 순입니다.

당연히 큰 딸부터 돌아가면서 자신의 계획을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운동, 학교 지각 안 하기, 살빼기, 방 치우기, 아침 먹기, 주말 함께 보내기, 일찍 자기, 교회 안 늦기, 빨래 직접 개기 등등 처음에는 자신의 계획만 말하다가 나중에는 “너 일찍 다녀, 아침에 깨우지 않게 좀 해라, 아빠는 출장 좀 그만 다녀, 엄마는 아침 밥 좀 주라” 등등 다른 사람에게 대한 요구를 나열하는 난장판으로 변해 배꼽을 잡다가 별 소득도 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약간은 진지한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둘째 딸 아이가 “아빠! 근데 왜 신년계획을 영어로 ‘resolution’ 이라고 하는지 알아? 내 생각에는 solution이란 단어의 뜻이 문제, 해답이잖아, 근데 신년계획에는 해답이 매년 반복되기 때문에 ‘Re’라는 접두사를 붙여서 ‘resolution’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럴싸해서 “그거 말 되는데” 했더니, 곧바로 녀석이 “그렇지? 그러니까 아까 나한테 주문한 아침에 일찍 일어날 것, 지각 안 할 것, 컴퓨터 그만 할 것 등등은 안 해도 되는 게 당연하지?” 하고는 낄낄 웃으며 제 방으로 휑하니 내빼버렸습니다.

또 녀석의 꼼수에 당한 것을 알고 실소를 흘리면서도 그 녀석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동안 ‘정말 신년계획이 plan이 아니고, resolution인 이유는 어찌 보면 달성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달성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것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신년계획을 달성하면 그 이상 좋을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루지 못했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내년이 또 있고, 내년 아침에 또 주먹을 불끈 쥐며 신년계획을 얘기할 수 있으니까요.

그게 바로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내년에 다시 세울지도 모르는 여러분의 올해의 resolution은 무엇입니까?


박준서 / 월드비전 부회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