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1-12-29 (목) 12:00:00
크게 작게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김지하(1941 - ‘)타는 목마름으로’ 부분

김지하 시인이 현실참여적인 종래의 시와는 달리 생명을 노래하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전향하게 된 일이 시사하는 바처럼, 이런 경향의 시는 흘러간 시대의 산물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시가 꾸준히 애송돼, 현대시인 100명이 꼽은 한국 대표 현대시 100편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를 오늘, 이 추운 겨울에 알았다. 민주주의, 자유와 같은 가치는 수시로 짓밟힐 수 있으며 푸르른 그리움
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언제든 다가올 수 있다 는 사실을.

김동찬<시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