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간이나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방치됐다. 오줌에 절어 있는 상태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최고 권력자였다. 그런데도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평소 의사들을 믿지 않았다. 독살을 당할 수 있다는 의심에서였다. 강박증에 가까운 그 의심 때문에 수많은 의사들이 국가반역죄로 체포돼 처형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도 감히 의사를 부를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막바지에 의사가 달려오긴 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멎어 있었다. 그의 죽음- 스탈린의 죽음은 사망 6시간 뒤 공표됐다. 그의 죽음은 어찌 보면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었다.
독재자의 죽음은 죄과의 업보인 경우가 많다. 히틀러의 죽음이 그랬다. 무솔리니도 그 죄과로 살해되고 시신마저 거꾸로 매달리는 수모를 당했다.
그 최근의 예는 리비아의 카다피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반군을 ‘쥐새끼’에 비유했다. 그러던 그가 반군에 쫓기고 쫓겨 마치 쥐새끼처럼 수채 구멍에 숨었다. 그러다가 붙잡혀 갖은 수모 끝에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그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랍의 독재자는 이라크 최후의 왕 파이젤 2세다. 1958년 불과 23세의 나이 때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리고는 말뚝에 꼽혀 사지가 절단됐다. 시신까지 훼손되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다.
독재자의 죽음에는 항상 세인의 관심이 집중된다. 그 죽음이 그동안 쌓아온 죄과의 업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독재자들의 비참한 말로는 역으로 그 체제의 사악성을 반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엄청난 죄과에도 불구하고 침대에 누워 독재자가 숨진다. 그럴 경우에도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기는 마찬가지다.
반면 은퇴한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의 죽음은 그러나 별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 경우 그 죽음은 사적인 죽음이다. 그러나 독재자의 죽음은 그 자체가 여전히 정치이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타이밍에 숨졌다.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그 두 사람의 죽음도 그렇다.
‘벨벳혁명(Velvet Revolution)’의 주인공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를 이끌었고 체코를 성공적인 자유경제 국가로 안착시킨 인물이 하벨이다. 그 체제하에서 200만에 가까운 사람이 굶어 죽었다. 한 마디로 죽음의 체제의 장본인이 김정일이다.
그런데도 하벨의 죽음은 김정일의 죽음에 비해 조명을 덜 받고 있다. 왜? 하벨의 죽음은 안식이다. 평화의 쉼이다.
김정일의 죽음은 그 자체가 여전히 정치다. 자칫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파멸로 몰아갈 수도 있는 수령절대주의란 광란의 정치극, 그 제 3막의 시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