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1-10-25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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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 장롱 위에는 웬 물건들이 저리 많은지요 겨울 점퍼가
들어 있는 상자들, 못 쓰게 된 기타, 찬합통, 고장난 전축, 부러진 상다
리들이 저희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가난한 집 방바닥을 내려다봅니다
가난한 집 장롱 아래는, 술 잔뜩 마시고 고꾸라진 늙은 남자가 누워
있습니다 어둠의 밀도와 병이 진행되는 속도에 따라 남자의 흰 수염
이 자라나고 움직이지요 하얗게 일렁이며 꽃 피우는 창백한 봄을, 가
난한 집 형광등의 침침한 눈이 끔뻑 끔뻑 바라봅니다 가난한 집 물
건들은 모두 사연 있는 듯 입이 무겁고, 가난한 집 아기는 종일 무릎
으로 걷다, 심심하면 무릎을 안고 잠이 듭니다 가난한 집 행주는 소
심하게 몸 빙빙 말고 있고, 가난한 집 선풍기는 우스꽝스럽게 달달 돕
니다 돌다가 끽, 끽, 헛소리도 합니다 가난한 집 장롱 위, 오래된 물건
들은 보좌 위에 앉아 시름 많다고, 먼지들만 슬금슬금 날아듭니다

박연준(1980 - ‘)가난한 집 장롱 위에는’ 전문.


가난한 집 장롱 위에는 부잣집이라면 당장 버려버렸을 잡동사니로 가득합 니다. 아니, 장롱 그 자체가 버릴 물건이겠지요. 장롱 아래는 더 가관입니다. 술에 고꾸라진 늙은 남자와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어 혼자 잠든 아기가 있 습니다. 술 취한 남자의 흰 수염이 자라난다고 하는 대목에서 독자들은 이 장면이 상상 속의 시적 현실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지긋지긋했던 가 난조차도 고장 난 전축처럼 그리워질 때, 과거의 그림들이 가슴을 아리게 하며 떠오릅니다.


김동찬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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