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미국인의 자원봉사 정신

2011-08-24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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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어렸을 때다. 프리스쿨로 몬테소리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당시에는 몬테소리 교육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주위의 지인이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 했다. 둘째도 같은 학교로 보냈다. 몬테소리 교육의 창시자는 이탈리아 출신의 의사이자 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다. 19세기 말 무렵부터 개발한 자신의 교육철학을 적용해 첫 학교를 1907년에 열었다고 하니 이제 100년이 넘은 교육방법이다.

비영리 학교였던 그 학교 운영주체는 특이하게도 학부모로 구성된 이사회였다. 그런데 큰 애가 이 학교에 다닌 지 한 이년쯤 되었던 때였다. 매년 새 이사를 몇 명씩 선임하는데 주위에서 나를 천거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마 동양인이며 변호사이기에 소수계 학부모들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겠다 싶어 추천을 했던 것 같았다. 그 때까지 학교관련 이사회에서의 활동 경험이 전혀 없던 나로서는 조금은 두려웠지만 그래도 추천해 준 사람들의 뜻을 무시할 수 없어 추천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학교운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전무한 내가 바로 이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가만히 듣고 배울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회의에서 미국인의 자원봉사 정신(American spirit of volunteerism) 문제가 대두되었는데 참 당혹스러웠다. 문제를 제기한 이사는 백인 여성이었다. 여러 해 동안 이사회에서 열심히 봉사해 오고 임원직도 맡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학교에서의 여러 행사 때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국한되어 있다면서 아직 미국인의 자원봉사 정신을 배우지 못한 부모들이 많이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 학교에는 당시 동양계, 특히 한국계 학생들의 숫자가 제법 늘어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반해 상대적으로 학교일에 자원 봉사하는 부모들이 적음을 빗대어 한 발언이었다. 나로서는 어떻게 대처를 해야 최선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이에 대해 다른 백인 여자 이사가 적극적으로 반박을 하고 나섰다.

반박의 논리는 이러했다. 학교운영을 책임진 이사의 발언은 책임을 수반하기에 항상 신중해야 한다. 자원봉사 정신을 얘기하면서 ‘미국인’을 거론한 것은 제 삼자가 들을 때에는 자칫 인종적인 편견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에 적절하지 못하다. 특히, 미국에 이민 온지 오래되지 않아 영어도 미숙하고 여러 가지로 이곳 생활에 익숙지 않은 부모들에게 일방적으로 어떤 기준을 세워 그것에 맞춰야 하는 것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나는 당시 유일한 소수민족 출신 이사로서 그리고 이민자로서 이러한 공방이 오가는 사이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자원봉사 정신이 부족하다는 일방적인 비난에 동조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입장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학교에서 자원 봉사하는 부모들의 대부분은 백인들이라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사이 훼어팩스 카운티 공립학교의 경우 이제 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소수민족 출신으로 바뀌는 변화를 보여주었다. 아니 더 이상 백인 학생들이 다수가 아니니 백인 학생들을 소수계라고 해야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직도 학교에서의 자원봉사자들의 대부분은 백인 학부모들이다. 이는 학부모회(PTA) 뿐만 아니라 자원봉사의 손길이 필요한 각종 행사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물론 소수민족 학부모들의 참여도는 20년 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그러나 이제 과반수의 학생들이 소수민족 출신임에 비해 아직도 소수민족 부모들, 그리고 한인 부모들의 참여 정도는 기대 이하인 것도 여전한 사실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민생활이 아직 정착되지 않아서, 그리고 언어 장애 때문에 참여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만 할 것인가? 약 20년 전에 백인 여자 이사로부터 들었던 지적이 아직도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문일룡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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