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 아침의 시

2011-07-12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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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이 엘비스 프레슬리 기념병원을 탈출하고
거나하게 술에 취해 아파트에 돌아와서
쉬일라에게 열쇠를 내놓으라고 떼를 쓸 때
어느새 두 대의 패트롤 카가 달려와서
등 뒤로 수갑 채우고 그를 연행해 갔다
잔이 새벽녘에 다시 돌아왔기에
내 집 거실에서 하룻밤 묵으라고 했더니
잘 곳 없어서 온 것 아니라며 소리소리 쳤다
이튿날 아침 등교 길에 보니, 잔은
해가 중천에 뜬 줄도 모르고
잔디밭에 쓰러져 잠들어 있었다
이번에는 사람과 경찰은 모두 괜찮은데
근처 나무에 둥지 틀고 새끼 친
입내새 한 쌍이 난리가 났다

도한호(1939 - ) ‘잘 곳’ 전문

‘잔 영감에 대한 추억’이라는 부제 아래 담겨진 연작 시 중 하나이다. ‘잔’이라는 독거노인은 인정이 많은 만큼 외로움을 타서 여자들을 수시로 바꿔가며 끌어오기도 하고 버림받기도 한다. 결국 가난은 깊어가고 알콜 중독까지 겹쳐 아파트에서 쫓겨나고 만다. 시인의 능청맞은 화법에 이끌려, 웃으며 그의 시들을 읽다보면 독자는 어느새 심각한 질문을 품게 된다. 과연 이 소외와 절망의 늪에 구원의 빛은 오는 걸까. 우리는 그 문을 이미 잠가버린 것은 아닐까.

김동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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