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걷는 길

2011-02-0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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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잠잠해도 좋다. 가끔은 바람이 나목들 사이로 거칠게 지나간들 어떠랴. 지붕 위로 투두둑투두둑 떨어지는 처연한 빗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그만이다.

깊어가는 밤을 따라 그렇게 비가 내리면 칠흑 같은 어둠을 더듬어 슬그머니 가부좌를 틀고는 한다. 그럴 때는 굳이, 호소력 짙은 해금의 소리를 낮게 듣는다. 해금이 자아내는 서럽고도 구슬픈 선율과 함께 빗소리에 젖어 보는 삼매는 또 다른 선열을 맛보게 한다.

깊은 비애를 느끼게 하는 선율은 되레, 산란하고 음울한 마음을 위무하고 정화하는 묘약이기도 해서, 차라리 흐느끼며 넘나드는 해금의 소리너울이 걸맞다.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해금 연주가 정수년의 독주곡 ‘그 저녁 무렵부터 새벽이 오기까지’는 그대로 맞춤이다.


도대체 그 곡조는 무정하리만치 비통하다. 슬픔을 한껏 머금은 선율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잠긴 듯 쉰 듯, 때로는 머문 듯 가늘게 떨며 저리도록 아프고 애절하게 타올라 종극에 닿는다. 그러나 그 도리 없는 비통의 임계에서, 해금의 선율은 완숙의 경지에 이른 그녀의 손끝에서 해방되어 열락으로 전화된다.

이 미려하고 앙증맞은 해금이란 악기는 줄이 달랑 두 개뿐인, 극히 절제된 찰현악기이다. 따라서 이 악기는 일정한 음자리가 없어 연주자의 정확한 음감이 요구되는 악기이기도 하다. 고정된 음자리가 없다는 것은 반면에 어떤 음자리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해금은 연주자의 기량에 따라 동서양 음계를 모두 소화할 수 있어 풍부한 선율과 다양한 음색으로 연주할 수 있는 탄력적인 악기이다.

그래서 해금은 열린 악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열린 악기도 열린 연주자를 만날 때 비로소 완전하게 열리게 마련이다. 열린 연주자는 해금이 지닌 무한한 음의 가능성 속에서, 자유롭고 폭넓은 사고와 적극적이고 끊임없는 창의적 실험정신으로, 박제된 틀을 깨는 즉흥성과 다양한 소리의 변주를 빚어낸다. 그들은 독특하고 신묘한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날마다 나아가야 하며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다. 또한 새로워져야 나아갈 수가 있게 된다. 그것은 순간순간 다시 걷는 소리의 길이며, 어쩌면 구도를 위한 고행의 길이라 해도 되겠다.

그러나 그 길이 어디 소리를 만드는 그들만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겠는가. 물론이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마땅한 창조적 삶의 길이기도 하다.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역동의 길이기도하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중국 은나라(기원전 11세기께) 탕왕의 세숫대야에 때마다 마음에 새기도록 새겨진 말로,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옛 선비들의 학문과 생활의 필수지침서인 근사록에서도 ‘군자의 배움은 반드시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은 날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날로 새로워지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날로 퇴보하게 된다.’고 했다.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해, 이미 새로운 길에 들어섰다. 다시 걸어가야 하는 길이다.

가야만 할 길이라면, 하루하루를 참신하게 연주하는 열린 연주자가 되어야겠다. 필일신(必日新) 반드시 날마다 새로워져야겠다. 기왕이면.


박 재 욱(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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