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9시 경에 급히 알린다며 오늘은 메시나(Messina)에 가지 못하고 대신 시실리의 수도 팔러모(Palermo)에 기항 한다고 했단다. 폭우로 메시나에 산사태가 일어나 여러 명이 죽고 길이 파손돼 관광이 불가능 하단다. 우리는 유럽에 온후 비 한방울도 구경 못했는데 얼마 안떨어진 곳에 폭우가 이틀동안 쏟아졌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온 탓인가? 이곳 팔러모의 10월 5일은 역시 청명하고 77F가 낮 최고 기온이란다. 시실리 시간은 희랍 보다 한시간 늦게 가 6시 57분에 해가 뜨고 6시35분에 진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세지, 베이컨 등으로 배를 차곡차곡 채우고 여행사 직원과 갈 곳을 상담하고 큰 지도 하나 얻고 프론트 데스크에가 200유로를 사고 샌드위치, 과일, 물 등을 준비 해 오전7시에 내항에 도착한 배에서 8시경 내렸다.
여태 다닌 항구들처럼 누구하나 우리의 신분증 보자는 사람도 없고, 입국을 관리하는 모자 쓴 사람 하나 보지도 못 했다. 부두는 도심에서 불과 1마일도 안 떨어져 있고 부지런히 다니면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명소는 다 볼듯 하고 시 외곽에 있는 명소는 서부 지중해를 돌때 다시 오니 그때 보기로 했다.
넓은 항구의 도크들에는 지중해 북단에 있는 Genoa, 투스카니(Tuscany) 지방의 관문인 Livorno, 로마 북쪽에 있는 Civitavecchia, 이태리 동남부에 있는 Naples, 큰 섬이며 이태리의 농장인 Sardinia의 수도 Caglian, 아프리카 북단의 Tunis를 간다는 대형 카페리와 여객선들이 정박해 있었다.
지금 이 크루즈가 가는 데는 이곳에 있는 여객선으로도 다 갈수 있을 것 같다. 항구에서 나와 현재 있는 곳과 동과 북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는 바다와 나란히 가는 큰 길 남쪽으로 내려 왔다. 70만명이 산다는 도시이어서인지 아침 출근 때문인지 길은 차로 꽉 차 있었고 스쿠터는 사방에서 소음을 내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시리아와 레바논 해변가에 근거를 두고 해양과 교역에 능했고 창세기에도 인용되며 솔로몬(Solomon)의 성전도 지어준 Phoenician (피니키아인)들이 이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그후 이 도시는 희랍족이 시실리섬 동남부에 세운 도시국가인 시라큐즈(Syracuse)의 영향 밑에 있었고 그 후는 로만, 비잔틴, 아랍족은 아니지만 북부 아프리카와 아리비아 반도의 사막지에서 살던 회교도들인 사라센(Saracens), 튜니스에 있던 아랍족의 카르타고(Carthaginian) 왕국들에 예속 되었고 12세기에는 바이킹(Viking) 족의 후예며 기독교도들인 노르만인(Norman)의 통치를 받았다고 한다. 12세기 이후엔 아랍시시리, 스페인, 나폴리 왕국 등에 속했고 18세기부터는 이태리에 속하고 있다. 2차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 도시안의 파괴가 컸다고 들었다. 외인들의 잦은 침략
과 통치로 시실리식 실생활 문화 예술과 건축 양식이 정복자 것들과의 퓨전형이란다. 고급 패션샵들 옆에 비잔틴 스타일의 거리 자판시장에서, 아름다운 고대 중세의 훌륭한 건물과 슬럼같이 험한 시멘트의 연립 주택들에서, 관광지와 그 뒤쪽의 더럽기 짝이 없는 거리등에서, 집 앞쪽은 훌륭한 조각들의 정원과 뒷쪽의 두세줄로 쳐 놓은 엉킨 빨래줄에서도 음양이 크게 교차함을 느낀다.
사람들은 급하고 과격하며 타인의 사정을 배려치 않는 행동 등이 배어 있다
고 하며, 가톨릭 성당인지 무슬림의 사원인지 십자가만 빠지면 구별이 어려운 교회에서도 퓨전문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돈세탁은 물론이고 탈세는 다반사이며 고리채가 판을 치는 지하경제가 발달되어 있다고도 한다. 치외법권적인 마피아 집단의 거점도시 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 도시에는 관광객이 항상 몰
려온다는데 특이하고 예술적인 건축, 기복이 많은 역사가 주는 다양함, 특이한 음식과 과일도 한몫 할 것이고 지중해에서 날씨가 제일 좋은 덕도 있다. 우리 부부도 왔다.해변 옆의 크리스피(Crispi)가를 따라오다 로타리를 만나고 거기서 오른쪽의 시내로 들어오면 꽤 넓고 번화한 로마가가 나왔다. 이 근방에 있는 고고유물 박물관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거기서 얼마 안떨어진 곳에 마시모(Massimo) 극장도 있었다. 1900년경에 오페라 극장으로 문을 열었고 1970년대 중반부터 약 25년 동안 내부 수리를 한 이태리에서 제일 큰 극장이란다. 성악가 카루소(Caruso)의 마지막 공연을 한 곳이고 다음 주에는 정명훈씨가 여기서 팔러모 교향악단을 지휘 한다고 극장 앞의 큰 광고판에 적혀 있었다.
정문도 옆문도 꽉 잠겨있고 출근한 사람도 없는가 보네. 좁고 미로 같은 길은 고대 도시니 할수 없지마는 차와 스쿠터가 뒤엉켜 신호등이 오히려 소통에 불편을 주는 것 같고 좁디 좁은 인도가 쓰레기로 덮혀있는 데가 많아 내가 마나님에게 민망할 정도였다. 과일상들이 벌려놓은 사방의 좌판 위에는 포도 감 귤 등이 많았고 특히 자두보다도 크지 않는 감홍시는 먹음직스러웠다. 맛도 있다기에 열개를 사 나는 세 개를 순식간에 먹어 버렸다. 이태리 중부에 있는 아씨씨(Assisi)에 본부를 둔 프란체스코(Francesco) 파의 성당은 이곳에도 사방
에 있는 듯 팔러모 성당 오는 길에 한곳을 둘러보니 로마의 것 보다 제단과 교회 내부가 비교적 단순해 보였으나 프레스코 벽화는 사방에 있었다. 아마 회교도 사원이던 것을 성당으로 개조 했으리라. 팔러모 성당 (Cattedrale)은 처음 비잔틴의 회당으로 그후 사라센의 사원으로 있다가 12세기에 영국에 적을 둔 노르만들이 들어와 교회로 다시 개조 했다고 하는데 성곽 같은 건물 위에 돔을 올렸고 아치형의 정문을 냈으며 르네상스 때에는 바깥을 더 늘리고 개조 했다고 한다.
옆에 붙은 주교궁과 연결된 아케이드도 아름답다. 고전형의 이 건물들은 여러 건축 문화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 분명하다. 건물 안은 각 시대에 그려진 성화들로 채워져 있다. 성 마그달레나(Magdalena) 교회를 지나 팔러조(Palazzo Reale) 구역에 있는 노르만니(Normanni) 라는 왕궁으로 왔다.
이 왕궁 역시 아랍들이 9세기에 지은 시실리 왕국의 궁을 노르만(Norman)들이 12세기경에 개조해 다시 노르만왕의 궁으로 쓰였다며 이태리의 왕궁중 제일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고 한다. 일부는 지금 시실리의 의사당으로 쓰인다고 한다. 이 왕궁은 유명한 카펠라 팔라티나(Cappella Palatina) 라는 아랍-노르만-비잔틴의 복합된 스타일의 성 베드로를 기리는 채플로 내부에 있는 여섯 개의 대형 아치가 건물을 지탱 하며 아름다운 모자이크 타일과 나무로 된 천장, 정교한 무늬의 페인트, 벽과 바닥은 얇은 대리석을 깔아 화려함을 더 한 것 같다. 사람들이 최고의 멋진 채플을 지으려는 꿈을 제일 잘 실현한 곳이라고도 했다.
시실리 수도 팔러모의 우아한 폴리티마 채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