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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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명지 육로보다 배로 가야 쉬워

2010-06-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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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최덕광 박사의 지중해 연안 크루즈 여행기(4)

시비타베치아(Civitavecchia)는 오랜 세월 로마의 입출 항구로 여전히 많은 인파가 내왕을 하고 특히 몇 십대의 크고 작은 크루즈들과 여객선들이 항시 기항되어있어 로마의 관문이자 이태리 관광산업의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오후 1시경에 HA의 크루즈 배 Noordam의 입선수속을 하는 천막촌에 도착, 약 1,000명의 새 승객들과 함께 질서 있게 수속을 마치고 3시경에 배에 입실 할 수 있었다. 앞으로 22일간 이 방에서 자며 안식을 취할 것이다. 소파가 있는 큰 방은 아니나 층계와 가까워 좋고 베란다는 없어도 창문으로 바깥이 다 보이며 하층이라 배가 상층보다 덜 울렁거리리라. 오후 4시에 안전 주의사항을 듣고, 해지는7시를 약 반 시간 남기고 Bon Voyage! 저무는 서쪽해가 동쪽의 항구를 아름답게 물들인 속에 총 승객 2,000여명을 실은 산채 같은 배는 서서히 항구를 빠져나갔다.

앞으로 11일은 동쪽 지중해에서


지난번 육상으로 방문한 지중해 연안의 몇몇 도시들은 비슷한 몇 천년의 역사, 끊임없이 이어지는 외침과 지배족의 변경, 비슷한 기후, 선사시대부터 잘 발달된 해상교통과 교역 등으로 외관상 문화와 문명에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이번 11일동안은 이태리 동쪽과 서쪽, 총 8개국, 24개의 고적지와 도시를 돌아보며 역사, 인류, 문화, 또 건축 양식 등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오랜 미국생활에서 나대로 얻은 이 지방 출신들에 대한 선입견과도 비교해 보고 잘못이 있었다면 고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대부분의 고대 문명지는 배를 타야 쉽게 방문 할 수 있고 특히 방문지가 많을 때는 쿠르즈 이
용 방법이 제일 좋다.

망망대해로 나온 배는 평균 시속 20노트로 이태리 반도의 남쪽을 향해 밤을 새며 달린다. 아침 해 뜨기 전에 이태리 본토와 시실리(Scicily) 섬 사이의 좁은 메시나(Messina) 해협을 지나고 또 만 하루종일 동북쪽으로 달려 모레 아침7시에 아드리아틱(Adriatic) 해의 동쪽에 있는 크로아티아(Croatia)의 두브로브니크(Dubrovnik)에 도착 할 예정이란다. 선상의 음식은 불평 할 수 없게끔 다양하게, 쉽게 시도 때도 없이 먹을 수 있으나, 알코올이나 소다류는 비싸게 받으니 다음 3주간은 평소가 아닌 대로 커피, 티, 주스, 맹물만 마시고 살 작정이다.

인터넷 이용은 아주 낡은 컴퓨터에 위성중계로 굉장히 느린데도 이용료는 50분에 100달러를 받는다. 간단한 메일만 배에서 주고 받아보고 다른 소식은 기항지의 인터넷 카페를 이용하기로 했다. 베드 위에 타올로 잘 만든 동물 형상을 보니 룸 서비스는 좋을 것 같으나 하루 한 사람당 지불하는 12달러의 팁이 비싸지 않게 계속 좋은 서비스를 해 주기 바란다. 선상의 상품이나 다른 서비스는 굉장히 비싼 편이라 되도록이면 하지 말자.

아침 6시에 일어나 마나님과 3층의 트랙을 몇 바퀴 돌고, 선상 안내원이 이곳 지형과 역사를 설명하는 시간에 맞춰 10층 후미의 크고 툭 트인 방으로 갔다. 수평선에는 해가 뜨고 저 멀리 남쪽 섬에서는 실 같은 가느다란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20여분을 더 가서보니 시실리 북쪽의 애올리아(Aeolian) 라는 작은 섬들 중 바다를 밑변으로 하고 양변이 꼭 같아 보이는 삼각형 꼴의 스트롬볼리(Stromboli) 라는 산 그 정상에서 증기가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산은 시실리 큰섬의 에트나(Aetna) 산과 함께 살아있는 활화산으로 유명하다. 한시간 뒤에는 눈 앞에 확 트인 메시나 해협이 나왔고 멀리 양안이 눈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 넓이가 고작 5마일도 안되는 것 같은데 다리가 없는 게 이상하다. 시실리는 회교도와 기독교 또 여러 타 종족으로부터 침략을 계속 받은 과거사 때문에 본토인 특히 외부인에 대한 불신이 상당하다고 한다.

가이드에게 물어 보니 시실리 쪽은 다리 놓는 돈으로 낙후된 도로시설을 개선 해 달라, 지금 다니는 페리 보트로도 충분하다는 등의 반대로 못 놓고 있었단다. 이 해협은 세계 어느 곳보다 오래된 뱃길이고, 발상된 인류 문명의 전파 통로였으며 세계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침략의 전쟁, 종교의 전쟁을 지켜보았던 물길이다. 뒤에 들으니 2020년까지는 다리를 놓을 예정이란다. 동 지중해의 대단한 문물이나 도난품들이 이태리 반도와 프랑스, 스페인을 거쳐 서유럽으로 쉽게 가져가자면 이 해협을 통과해야만 한다. 죄수 사도바울이 이백 수십명의 기진맥진한 호송관, 사공 또 죄수들을 격려하며 로마로 잡혀 갈 때도 이 해협을 지났다. 북과 남유럽을 연결하는 최단 해상로여서인지 많은 배가 따라 오고 지나 가는 것을 본다.

승객은 대부분 영어권 나라에서 왔으며, 동양인은 우리 둘을 포함해 30명도 안되는것 같다. 지중해의 먼 바다로 나온 배는 동북쪽에 있는 이태리 반도의 장화 뒷굽을 향해 적어도 2미터는 될 듯한 파도 위를 가고 있고 마나님과 나는 자쿠찌의 20센치의 파도 안에서 허적거리며 가고 있다. 오후 무렵에는 정북쪽으로 향한단다. 내일 아침에 내릴 두브로브니크에 관한 지리, 역사 등과 선상 신문을 읽고 또 주책없이 비싼 도착지의 현지관광 안내 등을 읽으며 낮시간을 보내고 저녁시간은 선상 쇼도 보고 댄스 모임에도 다녀왔다. 영화구경, 컬리너리 아츠, 베이커리, 디지털 워크샵, 포토 갤러리, 아트 옥션, 공연,
카지노, 스파 등 다른 모임을 대강 살펴보고 앞으로 선상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알아 봤다.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오늘은 별 크지도 않은 성 안에서만 돌아다닐 참이라 바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들었다. 여권 지참도 필요 없단다. 일인당 19달러를 주고 비싼 왕복표를 사서 탄 버스는 부두에서 두브로브니크 성입구의 필레(Pile)라는 광장까지 15분도 안 걸리고 온 것 같다.크로아티아(Croatia) 남단의 이 성은 “아드리아틱(Adriatic) 해의 진주”로 불린다고 하며 이 성안에는 지금도 약 5만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미로 같은 골목길 양옆으로 꽉 찬 13-15세기의 붉은 지붕을 한 2, 3층짜리 돌이나 콩크리트 건물들에서 살고 있었다.

해산물, 와인, 치즈 등의 산지이며 기후가 좋아 년중 끝없이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뒷산 (Mt. Srd)너머에 사는 보스니아(Bosnia) 사람들 보다 잘 산다고 들었다. 라구사(Ragusa) 라는 공화국에 살면서 외침도 많이 받고 처음에는 희랍, 로만, 비잔틴 (지금의 이스탄불에 도읍한 동로마국), 오트만(Ottoman, Turkey), 베니스, 이태리, 불란서, 오스트리아, 독일, 특히 근래에는 슬라
브(Slavs)와 세르비안(Serbs) 들과의 전쟁과 분쟁의 연속이었고 유고슬라비아(Yugoslavia)를 거쳐 얼마 전 세르비아족의 몬테니그로(Montenegro)와의 살육전도 거쳤다.

11세기말 십자군들이 슬라브 족과 비슷한 세르비아 회교도들과 유대인들이 이 지방에 많이 살았던 것을 냄새 맡고는 이곳을 휩쓸고 갔다고도 한다. 보스니아의 유일한 지중해 연안 약15마일 때문에 크로아티아 본토와의 육로 연결이 안된다고 한다. 보스니아 쪽에서 보면 그 아름답고 뱃길 좋은 지중해 연안을 크로아티아에 다 뺏기고 있으니 특히 두브로브니크 지방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느껴질 만도 하고 그래서 이 둘간의 싸움은 끝이 없다고 했다. 16세기에는 큰 지진도 겪었다니 수난사가 그들의 역사이리라. 시 전체를 삥 둘러싸고 있는 성곽은 유럽에서 제일 아름다우며 제일 견고 하단다. <계속>
두브로브니크의 미로 같은 골목길 양 옆으로 13~15세기에 지어진 붉은 지붕을 한 건물들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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