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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칼럼/ 월드 트레이드 센터 뒷이야기

2010-03-2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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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삼(소유디자인그룹 대표)

전편의 정치적, 경제적 관점에서 본 월드 트레이드( World Trade Center)센터의 역사에 이어 건축적 관점에서 이번 칼럼을 시작해 보자.
1962년 9월20일 포트 오소러티(Port Authority)는 미노루 야마사키상(Minoru Yamasaki)을 메인 건축가로 에머리 로스(Emery Roth&Sons)를 부건축설계사로 공식 발표했다. 오리지날 설계 계획안은 타워의 높이를 80층으로 디자인하였으나 포트 오소러티의 용적률 요구조건이 1000만 스퀘어피트(93만 스퀘어미터)의 오피스 공간이었기 때문에 110층의 타워로 디자인은 변경됐다. 외형적인 특징으로는 좁은 유리창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야마사키상의 높이에 대한 공포심의 표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게 거대한 타워 건물의 각각의 유리창 넓이가 고작 18인치에 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미스테리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공식적인 디자인 아이디어는 건물을 사용하는 테넌트들에게 안전함을 강조해 주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내부에서 손꼽을 수 있는 가장 획기적인 디자인 중의 하나는 단연 엘리베이터 시스템이다. 맨하탄을 다니면 한번씩은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는데 로컬 정거장이 있고 익스프레스 정거장이 있다. 로컬 정거장은 로컬만 정차를 하지만 익스프레스 역에서는 모든 지하철이 같이 정차한다.이 원리를 초고층 타워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엘리베이터 시스템에 도입한 것이다. 일명 스카이 로비라는 곳을 44층과 78층에 각각 두고 독립적인 로컬 엘리베이터들을 설치, 운영하는 시스템으로 엘리베이터 기계 공간을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시스템으로 62%에서 많게는75%까지 사용자 공간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그 당시 프로젝트 사이트(Site)는 일명 라디오 열(Radio Row)이라고 불리는 수백 명에 달하는 비즈니스, 공장 일꾼들, 건물 주들, 그리고 약 100여명에 이르는 주민들로 구성된 꽤나 큰 로컬 커뮤니티가 생활하는 터전이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이주를 반대하며 대법원(United States Supreme Court)에까지 상소를 올렸으나 대법원은 그 상소를 기각하며 포트 오소러티의 손을 올려주었다. 많은 사회적 이슈와 비판 속에서 이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현장 데몰리션은 1966년 3월21일에 시작되었고 공사는 1966년 8월5일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 12월23일 1 월드 트레이드 센터(World Trade Center: North Tower)가 완공되고 첫 테넌트가 들어 왔으며 남쪽 타워는 1972년 1월께부터 테넌트를 유치하였다. 쌍동이 건물을 완공하였을 당시의 공사비는 무려 9억 달러를 초과하였다. 참고로 오프닝행사는 1973년 4월4일에 거행되었다.


1980년대 47층의 7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완공을 끝으로 월드 트레이드 센터 단지는 자그마치 16에이커(acres)를 차지하는 슈퍼 블럭을 형성하게 되었다. 1975년의 화재와 1993년 2월의 폭탄 테러 이후 1998년 포트 오소러티는 이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민영화하는 데 합의하고 2001년 99년의 임대 계약을 보나드 부동산 업체(Vornado Realty)와 32억5000만 달러에 계약을 하는 것
처럼 보였으나 마지막 순간 임대 기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후발 주자인 실버스타인(Silverstein Properties) 업체와 계약이 성사되었다. 그 때가 나인 일레븐(9.11) 테러가 발생하기 2달전인 2001년 7월24일이었다.
참혹한 테러 발생 이후 8개월 이상의 현장 제거 작업 이후 공식적으로 2002년 5월30일 잔해제거의 종지부를 찍는 기념식을 가졌고 7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새로운 공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마스터 플랜은 선정직후부터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지라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7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공사 지연 없이 순조로운 스케줄 속에서 2006년 5월에 다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더욱이 전기회사 콘에디슨( Consolidated Edison Cos.)의 파워 스테이션이 위치하여 다운타운의 전기를 공급해야 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공사속도가 다른 어떤 건물 동보다 한층 더 중요하지 않았나 필자는 추측 한다. 여러가지 경제적, 정치적 문제에 봉착한 리베스킨( Daniel Libeskind)의 마스터 플랜은 도날드 트럼프의 냉혹한 비평을 듣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정리 해보면 2006년 4월 마침내 자유의 타워(Freedom Tower) 공사가 시작되었고, 2006년 5월 타워3과 4의 건축가로 영국의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gers)와 일본의 후미히꼬 마끼(Fumihiko Maki)가 각각 선정되었다. 제이피 모건 체이스(JP Morgan Chase)에서 타워 5의 공사를 맡았고 KPF(Kohn Pedersen Fox)를 현재 담당 건축 설계 회사로 임명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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