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몽골이 오랜 공산주의 국가체제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문을 열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갔다. 몽골로 간 사람들은 크게 두 종류인데 하나는 몽골에 무엇인가를 기여하겠다는 생각으로 간 사람들과 몽골로 부터 무엇인가 이득을 보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 제일 먼저 달려간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 선교사들이다. 그들은 마치 언더우드나 아펜셀러처럼 몽골사회를 위해서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중에 괄목할 만한 것들은 대학을 세워서 운영하는 것들이다. 현재 5개의 한인이 세운 대학교가 있다.
몽골 국립대학교의 철학과 학과장인 받드수렝교수는 러시아에서 철학박사학위(Ph.D.)를 받은 재목인데 나에게 기독교 철학에 관해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해달라는 것이다. 몇 시간에 걸친 강의를 성공적으로 마친 어느 날 이런 말을 한다. “몽골에 나같은 외국인들이 와서 사는 것 자체가 몽골을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외국인들이 시내를 걸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 조차도 몽골을 위해서 매우 좋은 일입니다. ” 그런데 이 학과장이 새로 부임한 총장에 의해서 보직해임 처분을 받았다고 허탈해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재판을 하는 것인데 재판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거금 수백 달러를 기꺼이 내놓았다. 재판에서 이긴 학과장과 나는 어깨를 감싸 앉고 기뻐했다. 당시 정교수의 봉급은 100달러이었다.
몽골의 인민 혁명당 당수, 국무총리, 국회의장 그리고 대통령을 지낸 권력자의 정치담당 비서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이 친구는 오스트리아에 가서 유학한 지성인이다. 몽골에서 제일 큰 도(道) 인 트브아이막의 국회의원으로 나온단다. 그래서 타고 다니던 소나타 승용차를 선거운동에 사용하라고 주고는 걸어 다니다가 추운겨울에 얼굴이 동상에 걸린 적도 있었다. 이 친구가 주 한국 몽골대사관의 대사를 지냈는데 한국의 대사는 아주 인기 있는 자리란다. 이렇게 외국물을 좀 마신 젊은 인테리들은 몽골사회가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그 방향을 나름대로 제시하는데 그래서 한국을 경제발전의 모델로 삼은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통합)가 지원하여 설립한 울란바타르대학은 이제는 몽골의 대표적인 대학으로 성장했고 감리교회의 장로이자 광운 공대 학장을 지낸 분이 세운 후레정보통신대학과 ‘내려 놓음’이란 책으로 유명한 선교사가 부총장으로 있는 국제대학 모두 훌륭한 대학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몽골의 제 2의 도시인 다르항에도 선교사들이 신다르항대학을 설립하여 교사를 신축중인데 재정적으로 매우 어려운 모양이다. 그리고 연합신학대학을 세워서 몽골인 목회자들을 양성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몫을 감당하고 있다. 성경을 몽골어로 번역해서 출판했으며 몽골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보급하는데 기여한 선교사들의 역할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몽골의 대학은 설립하기가 쉽다. 개교 원년에는 한 개 학과를 운영할 만한 학생과 교수 몇 명 그리고 강의실 몇 개만 있으면 인가를 해주니까 대학을 비교적 쉽게 오픈할 수 있다.
나에게 대외협력담당 부총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준 ‘언어연구자대학교’(The Institute Linguist)는 몽골의 외국어대학인데 6개 국어를 가르친다. 한국어,영어,러시아어,독일어,중국어,일어 그리고 관광학과가 개설되어 있는데 이 대학교의 총장인 갈상박사는 러시아문학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은 ‘국민선생’ 1호이다. 전국민적으로 존경을 받는 분이기에 국민선생이라는 명
예로운 타이틀을 국가가 부여한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볼 수 있는 국민선생, 하여튼 아무나 받을 수 있는 타이틀은 아니지 않은가? 갈상박사는 몽골 국립대학교의 총장을 지낸 분으로 몽골 최고의 지성인들의 모임인 몽골아카데
미의 원장이다. 이 분의 연세가 당시 70이었는데 부인과 사별하시고 새 아내를 얻었는데 45세로 유명한 시인이다. 이 부인의 얼굴에 난 점을 연세친선병원의 닥터 박이 빼 준다고 마취를 하다가 부작용이 나는 바람에 며칠 입원을 하기도 했다. 이 젊은 부인이 영어회화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가르쳤는데 내 방에서 둘이 앉아서 공부를 할 때마다 총장이 문을 불쑥 불쑥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몇 달 하고는 그만 두었다. 물론 내 아내도 은근히
(?)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전교생이 약 600명 정도인데 지금은 더 많아 졌을 것이다. 이 정도면 학교 운영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갈상총장이 그 대학의 명예박사 1호의 타이틀을 학교에 공헌한 기여도를 생각하여 나에게 수여할 것이라고 하는데 아직 받지는 않았다. 2호는 지난여름 주몽골 러시아대사에게 주었다. 나 역시 몽골에 대학교를 설립하려는 꿈을 안고 갔다. 학교의 이름은 ‘중앙아시아대학교.’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실패다. 대학교 총장을 하는 것이 소싯적부터의 꿈인지라 미국에 와서 무리하게 학위를 받았는데 이 학위를 갖고는 미국이나 한국 같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을 일을
몽골에 가서는 해 보았다. 대학의 교무처장, 대학원장 그리고 부총장까지 해 보았으니…과연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이다. 동이족의 장부들아! 큰 뜻을 품을지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니라.
몽골에 가자마자 한인회 사무총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글학교를 세우려고 몇 년을 준비했는데 못했다는 것이다. 한 달 만에 개교를 하고 초대교장에 취임했다. 교장 선생님, 목사 타이틀 말고는 제일 애정이 가는 직함이다. 매주 토요일마다 모이는데 교수진들은 호화찬란했다. 과반이 대학교수들이었다. 나는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었다. 물론 무보수다. 조회시마다 애국가를 제창했는데 4절까지 다 불렀다. 용감한(?) 아비들을 따라 몽골까지 온 우리의 동이족 인재들과 애국가를 힘차게 부르며 꿈을 키워나갔는데 다음은 내가 작사한 몽골 한글학교 교가(校歌)다. 1절, “가슴마다 품어보자 저 푸른 꿈을 힘차게 달려가자 지구벌판을 자랑스런 배달민족 단군의 자손 대한의 건아들 몽골한글학교 2절, 민족사랑 조국사랑 세계를 품고 열심히 공부하자 깊은 배움을 이세상은 우리의 것 한겨레 자손 대한의 건아들 몽골한글학교.”
나는 서울의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학교를 가려면 파고다공원을 통과해야 했다. 당시 공원의 담벽은 일제(日帝)가 만세를 부르며 독립 운동하는 군중을 총칼로 진압하는 것이 부조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것을 보면서 민족애가 싹이 튼 것 같다. 학교 다니며 조회시마다 애국가를 부를 때면 왼지 모르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꼈고 만주벌판을 말 달리며 독립운동 하는 장군이 된 기분을 느낀 것은 나만의 생각인지 아니면 애국가의 신비스런 매력인지
모르겠다. 애국가 제창이 끝나면 담임선생이 학생들을 인솔하여 교실로 간다. 나는 한인자영업자들에게 연락하여 학생들에게 줄 간식과 교사들의 점심을 책임지고 대접하는 일을 기쁜 마음으로 했는데 물론 교사들도 무료봉사다. 나중에는 한국정부에서 약간의 비품구입비와 격려금이 내려왔는데 격려금을 나누어 가질 때가 그래도 즐거웠다.
연세대학교가 주동이 되어 설립한 연세친선병원이 몽골인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다. 친절하고 실력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데 병원 복도에는 환자들로 언제나 북적거린다. 동네마다 들어가 있는 선교사들이 불치병에 걸린 몽골인들을 서울에 데리고 가서 공짜로 수술을 해주고 치료를 해줌으로서 한인 선교사들의 인기는 매우 좋은 편이다. 또한 몽골의 고아들을 위하여 고아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는 선교사들도 있다. 한인선교사들은 동네마다 교회를 개척해서 몽골의 복음화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얼마나 진실하고 거듭 난 교인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선교
사들의 수고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몽골의 지식층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한인이 세운 대학이나 한인교육기관에서 한국어를 초등학교때 부터 배우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극소수이지만 초등학교에서 한국어 영어와 일어를 가
르치는 비싼 사립학교가 인기리에 운영되고 있다. 한글학교에도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몽골인들이 종종 있는데 나는 무조건 ok 했다. 한국에 가면 쉽게 목돈을 만질 수 있으니까 너도 나도 한국, 그러니까 무지개의 나라 솔롱고스로 돈 벌러 가려고 한국어 배우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몇 해 가서 고생하면 집도 장만하고 반듯한 비즈니스를 할 수 있으니까 서울로 갈려고 하는 것이다.
몽골에 가서 그들에게 무엇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가는 선교사 그룹이 있고 그 다음에는 몽골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보따리를 싸서 간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이 한 때 IMF 관리를 받을 당시 특히 많은 비즈니스맨들이 몽골로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할 수 없지만 몽골에서는 할 수 있기에 작은 자본을 가진 한국의 사업가들이 몽골로 간 것이다. 특히 한국음식점을 많이 오픈하는데 아마도 거의 50개 정도는 될 것이다. 한국에서 이런 저런 일로 마음에 상처가 깊거나 끼가 있는 한량들이 몽골에 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몽골의 예쁜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다. 몽골의 남정네들이 솔롱고스의 여인을 사모한다면 몽골의 미인들 또한 솔롱고스의 남자들의 마음을 사려고 애쓴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데 원래가 한 핏줄 아닌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한지붕 아래서 사는 많은 한몽 커플들이여 아무쪼록 재미있게 알콩달콩 사시라. 한 가지 당부할 것은 미인들을 외국인들에게 몽땅 빼앗긴 몽골남정네들의 질투심이다. 칼잡이의 후손들이다. 부디 몸조심하시라.(NJ Fort Lee 한사랑 교회 담임목사, moneun@gmail.com)
몽골한글학교 개교식에서 연설하는 신재영 목사.
언어연구자대학 졸업식에서 전통의상을 입은 졸업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