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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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영목사의 몽골 체험기 (31)몽골로 보내진 6.25고아들

2010-02-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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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왔건만 겨울같이 추운 어느 봄 날, 아직도 몽골의 풍경은 생경한데 옆 사무실의 자선단체의 장이 어디를 같이 가잔다. 6.25직후 북한에서 전쟁고아 100명을 몽골로 보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 구역에 산다는 것이다. 세계 최빈국중의 하나인 몽골인지라 여러나라에서 구호품이 답지하는데 그 구제품을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알았다는 것이다. 고마운 생각으로 같이 갔다.

울란바타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의 변두리, 그녀의 집은 길이 2M 폭1.5M 인데 천장이 너무 낮아서 고개를 들고 서 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의자가 없으니 앉을 수도 없고…판자집인데 석탄도 바닥이 났는지 방안에는 냉기가 감돈다. 그 집 주인인 그녀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했다. 정신도 좀 나간 것 같았다. 하나 있는 아들도 정신장애자다. 사람인지 짐승인지 나는 그렇게 이상하게 생긴 사람을 처음 보았다. 몇 해 전 중국의 장백산(백두산) 근방의 장백현 조선족 자치주에서 만난 젊은 북한 동포 오누이가 생각났다. 연변으로 먹거리를 찾으러 밀입국한 그 남매는 너무나 못 먹어서 얼굴이 주근
깬지 기민지로 분장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분은 그 난민보다 더 형편이 말이 아니다. 북한 동포는 그래도 눈빛은 살아서 반짝였는데 이 늙은 전쟁고아는 절망과 회한으로 가득 찬 두 눈에 희망이라고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어린 고아들을 몽골로 보낸 김일성이가 밉다. 어린 영혼을 받았으면 잘 보살폈어야지 이렇게 만든 몽골도 밉다. 몽골의 풍토에서 볼 때 솔롱고스의 부모없는 고아들을 그대로 곱게 둘리가 없다. 임자가 있어도 강탈해서 데리고 사는 인간들이 아닌가? 그 나이어린 솔롱고스의 여자들이 얼마나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을까? 왈칵 눈에 눈물이 고인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 중앙에 김정숙 유치원이 있다. 몽골에서는 최고급 시설이란다. 김정숙이 누군가? 김일성의 처가 아닌가? 같은 공산주의 사회주의를 하는 나라들인데다 같은 동이족 후예라고 몽골과 북한은 일찍부터 교류를 했다. 그러면 뭐하나? 인권을 우습게 알고 인민을 굶어죽게 만드는 나라가 아닌가? 몇 해 전만 해도 몽골경찰서에 잡혀온 피의자는 남녀불문 무조건 옷을 홀랑 벗겨서 담요 한 장 주고는 유치장에 집어 놓고 보았다 . 칭기스칸은 그의 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 이는 하늘의 이치를 정
면으로 거스린 것이다. 하늘의 섭리를 거역하는 자는 반드시 하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노자는 말한다. 용어감(勇於敢). 억지로 하는데 용감하다는 말이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아니하되 잘 이기고 말하지 아니하되 잘 응하고 부르지 아니하되 스스로 오고 느릿느릿하되 잘 계획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성긴듯 하되 놓치는 일이 없다. 하늘이 쳐놓은 그물을 빠져나갈 용사는 아무도 없다. 하늘이 갈아대는 맷돌을 피하여 나갈 인간은 아무도 없다. 성경은 의(義)를 심은 자는 의를 거두고 불의(不義)를 뿌린 자는 불의를 거둔다고 했다.


중국이 곧 미국을 이어서 제 2의 대국이 될 것이고 세계를 리드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전망하고 얄팍한 머리를 굴리는 한국에서는 중국으로 조기 유학을 보낸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중국은 곧 쪼개지고 망할 나라다. 왜냐하면 공산당 정부는 하늘의 도를 거스르는 일을 너무나 다반사로 하기 때문이다. 중국처럼 인격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가 어찌 대국이 되겠는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내가 몽골에서 줄기차게 생각했던 화두(話頭)는 왜 칭기스칸의 대제국이 오늘날 이렇게 형편없이 쫄딱 망했는가? 어찌하여 인간의 세상은 그렇게 흥망성쇠가 물레방아처럼 돌고 돌아가는가? 총명한 칭기스칸이 하늘의 도(道)와 이치(理致)를 알지 못했을 리 없을 것이다. 아마도 어쩌면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탔기 때문에 그냥 달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죽이지 않으면 오히려 죽어야 하는 상황. 세상의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연(自然)의 도(道)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부귀(富貴)와 공명(公明)의 욕심을 쫒다가 패가망신을 당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무위자연(無
爲自然)의 도를 따라 자신이 사는 집을 좁게 여기지 말고 자기의 직업을 싫어하지 말아야 하고 이에 만족한 줄 알고 살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이 마음에 든다. 그래서 수 십 번도 더 읽었다. 노장사상은 마치 구약성경의 지혜문헌인 잠언(箴言)과 전도서(傳道書)와 너무나 흡사하다. 노자는 말했다. 용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을 억지로 추진해 나가는 적극적인 용기와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소극적인 용기이다. 그런데 무리하게 밀고 나가는 용기는 끝내는 다른 사람을 죽이며 결국은 자신마저 죽인다. 그러나 일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을 따라 행하는 용기는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기 자신도 살리는 것이다. 결국 하늘의 도는 하늘의 도를 따라 사는 사람을 도와주며 악한 삶을 사는 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하는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노자는 초(楚)나라 사람이다. 공자의 자손이 들으면 화를 낼 노릇이지만 공자가 유치원이라면 노자는 대학원생이다. 공자가 낮의 생활을 말했다면 노자는 밤의 생활을 말했다. 모든 일이 대낮에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실인즉슨 중요한 결정은 밤에 이루어진다. 공자가 인간의 일상사의 윤리정도를 말했다면 노자는 하늘의 법을 설파한 셈이다.

혹시 노자나 장자(莊子)도 공맹(孔孟)처럼 동이족이 아닐까하여 서책을 살펴보았지만 아직 그렇다는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라는 심정이 굳어진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간다는 말이다. 나는 20대 때 주역(周易)을 읽으면서 무릎을 치며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주역에 천지
창조의 순서가 나오는데 창세기의 그것과 똑같았을 뿐만 아니라 그 사상이 성경의 말씀과 많이 상통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주역을 성경다음으로 훌륭한 책으로 여긴다. 그 때부터 동양의 문명과 고대 유대문명과의 어떤 상관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류의 지성사(知性史)를 압축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은 인간의 격(格)을 세워주는데 매우 큰 역할을 해준다. 고전은 모든 인간들이 반드시 심사숙고해야 할 인생의 근본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고전의 정상에 각 종교의 바이블이 있다. 하여 나는 만약 우리들의 영웅인 칭기스칸이 각 종교의 경전과 노장철학을 알았더라면 역사가 어떻게 변하였을지 궁금해진다.

칭기스칸이 실력자가 되면서 각 종교를 연구하여 몽골에 적합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찾아보라고 지시했었다. 결론은 티베트 불교다. 그것이 칭기스칸의 한계였다. 허지만 그도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에 몽골 백성의 과반수가 고대 기독교의 한 분파인 경교를 믿었다.신라시대에 창건된 불국사에서 기독교의 상징인 돌 십자가가 출토되어서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무슨 연고일까? 고대 기독교의 한 파인 네스트리우스파는 당시 교회의 모임에서 이단(異端)으로 판정을 받고는 동방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것을 경교(景敎)라고 한다. 경교는 소위 말하는 정통교회의 교리 중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교리가 조금 다르다. 그래서 배척을 받게 되었고 중앙아세아로 흘러갔다가 신라까지 간 것이다. 당연히 그 길 선상에 있는 중국과 몽골을 통과하면서 자연스럽게 경교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중국의 장안(長安)이나 몽골의 수도였던 하라호름에는 지금도 그 자취를 엿볼수 있다.

현재 몽골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은 우리나라와 일본 사람들의 관계처럼 속으로는 엄청 미워하는 사이이다. 그러면 중국과 몽골은 왜 사이가 좋지 않은가? 지나로부터 북쪽 오랑캐라는 멸시와 천대를 받다가 지나를 점령한 몽골은 중국의 모든 남자 어린이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린다. 다시는 칼을 잡지 못하고 활을 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무리수를 둔 것이다. 애급이 이스라엘을 400년간 종살이 시키다가 마지막에는 모세가 태어날 때 모든 유대의 남자어린이를 다 죽였다. 헤롯왕 역시 그런 짓을 되풀이 했다. 헤롯이 누구인가? 지금의 팔레스타인 출신 왕이다. 그러니 그들은 그렇게 매일 싸움질을 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일본은 우리의 성씨(姓氏)를 바꿔버렸다. 수많은 여인들을 유린했다. 수많은 사람을 전쟁에 끌어 들여 죽였다. 곡식을 강제로 공출해갔다. 저들이 살려고 우리를 죽게 만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시키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그러니 원수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것들이 하늘의 뜻은 정녕 아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인간들의 살육의 싸움질, 언제까지 할 것인가? 현대인들이 항상 곰씹어 볼 어휘, 노자의 용어감(勇於敢)! 고로 하늘의 섭리를 거역하는 자는 반드시 하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NJ Fort Lee 한사랑교회 담임목사 moneun@gmail.com)HSPACE=5
노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당(唐)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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