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부할 수 없는 황홀한 매혹

2010-02-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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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적 패션으로의 초대 ‘파리 오트쿠틔르’

귀족적 아름다움과 클래식한 기품을 과시하는 패션쇼 ‘2010 봄·여름 파리 오트쿠틔르’가 끝났다. 경기침체가 세계 곳곳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이 시기에 결코 대중적일 수 없는 오트쿠틔르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사치인지도 모른다. 지극히 섬세하고 화려한 예술작품 같은 의상은 가격을 매기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소수의 특별한 고객을 위한 옷이어서 대중의 외면을 받기 쉽다. 그래서 오트쿠틔르는 가브리엘 샤넬의 사망, 발렌티노의 은퇴, 크리스찬 라크르와의 파산보호 신청 등 패션계를 뒤흔드는 굵직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존속 자체에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올해도 파리 오트쿠틔르는 여전히 건재함을 보였다.


티미스터·스테판 롤랜드와
샤넬·크리스찬 디올의 거장들
화려한 디자인의 성찬 과시


신장식주의의 거장 크리스찬 라크르와(Christian Lacroix)가 빠진 자리를 그로테스크 뷰티의 대가 티미스터(Thimister)와 팝스타 셰릴 크로우가 가장 사랑하는 디자이너 스테판 롤랜드(Stephane Rolland)가 채웠다. 특히 10년 만에 오트쿠틔르에 참여한 티미스터는 봄 컬렉션을 런웨이에 내놓은 다른 디자이너들과 달리 ‘유혈과 군수품’이란 테마의 가을 컬렉션을 선보여 거장의 귀환이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마리아 그라지아 치우리와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를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로 맞이한 발렌티노(Valentino)는 비록 오트쿠틔르 데뷔전에서 고배를 마시긴 했지만, 세 번째 시즌을 맞아 은퇴한 패션계의 거장 발렌티노와는 차별화된 젊은 감각의 디자인 철학을 확고히 드러냈다. 아직 컬렉션 자체가 완벽하고 지속성이 있다고 할 순 없지만 발렌티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새로운 고객 확보에 나선 것은 분명하다.

‘오트쿠틔르의 꽃’으로 불리는 샤넬(Chanel)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와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의 존 갈리아노, 그리고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는 이번 시즌에도 오트쿠틔르 컬렉션이 얼마나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특히 이번 시즌 피날레는 부쉐론(Boucheron), 카티에르(Cartier), 반 클리프 앤 아펠(Van Cleef & Arpels) 등 보석의 명가들이 예술 작품 같은 고급 의상에 어울리는 ‘하이 주얼리’ 쇼를 펼쳐 파리 쿠틔르를 더욱 화려하게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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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화이트 웨딩드레스와 파스텔 메탈릭 턱시도로 다가올 우주시대의 결혼식을 선사했다.


오트쿠틔르에도
‘아바타 블루’등장

이번 시즌 오트쿠틔르에도 올해의 컬러인 ‘아바타 블루’가 등장했다. 컬러연구소 팬톤이 올해의 색으로 내세운 컬러는 영화 ‘아바타’를 뒤덮은 ‘터코이즈’(turquoise·터키석 블루)이다. 미국의 금융위기로 경제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2009년, 희망의 메시지를 담아 ‘미모사’를 올해의 색으로 지정한데 이어 2010년은 열대 파라다이스가 연상되는 색상 ‘아바타 블루’를 지정한 것이다.

파랑과 초록의 가운데인 청록색에 해당하는 터코이즈는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중간색이 가지는 오묘한 매력이 있다. 마치 열대 휴양지의 해변 앞에 펼쳐진 영롱한 바다빛과도 같은 색감. 아직 체감경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불황이 바닥을 치고 회복세로 돌입했다는 긍정적인 전망도 나오는 만큼, 팬톤은 힘들었던 한해를 보낸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훌쩍 여행을 떠나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리라고 보고 터코이즈를 추천했다고 한다.

2010년 봄·여름 오트쿠틔르 컬렉션에서 영화 ‘아바타’의 영향을 내세운 디자이너는 발렌티노의 새로운 수석 디자이너 마리아 그라지아 치우리와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다. 벌사체가 내세운 블루 드레스나 데릭 램의 터코이즈 재킷처럼 아바타 블루를 전면에 내세우진 않았지만, 런웨이에 등장하는 모델들의 어깨에 아바타 블루 컬러의 스프레이를 뿌려 모던하면서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냈다.


다음은 장 폴 고티에 컬렉션. 패션쇼가 펼쳐지는 내내 마리아치 밴드의 음악이 깔리며 모든 이들을 멕시코로 인도했다. 아즈텍 황제 목테주마에 관한 전시회에서 영감을 받은 고티에는 이번 시즌 런웨이에서 아바타 부족의 자연친화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늘 자신감 넘치는 컬렉션을 선보여온 고티에는 프랑스 패션 아이콘 아리엘 돔바슬에게 카르멘 미란다의 불꽃 같은 삼바 연주를 립싱크로 연출하며 런웨이에 깜짝 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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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고티에 2010 봄·여름 오트쿠틔르 컬렉션에 등장한 여배우 아리엘 돔바슬의 아바타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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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만화 속 주인공인 듯 하트 모양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로코코 힐의 실버 부티를 신은 모델들이 런웨이에 등장한 샤넬 컬렉션은 매혹적인 로맨티시즘과 놀랄 만큼 진보적인 우주시대를 떠올리게 했다. 칼 라거펠트가 처음으로 블랙과 네이비를 배제하고 실버와 파스텔 색상만으로 런웨이를 수놓았다. 미니 길이의 샤넬 수트와 시프트 드레스, 코쿤 형태의 버블 드레스 등이 등장하자 백스테이지에서는 퓨처리즘을 거론했지만, 칼 라거펠트는 “나는 퓨처리즘을 싫어한다. 미래를 위한 아방가르드 패션도 믿지 않는다. 패션은 언제나 현재에 머물고 있다”고 딱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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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찬 디올

디올의 수석디자이너 존 갈리아노는 마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커스튬 인스티튜트에 매료된 듯 3,000송이의 장미꽃이 만발한 무대에 승마복과 파스텔 톤의 칵테일 드레스, 영국 상류사회의 파티 드레스 등을 입은 오만방자한 표정의 모델들을 세웠다. 갈리아노는 “미국인으로 파리 모드계, 특히 무슈 디올의 뉴룩에 가장 영향을 미친 디자이너 찰스 제임스의 사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 옛날 찰스 제임스가 피팅을 하던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뒷벽에 걸려 있던 말안장을 타는 여성 그림에 시선이 꽂힌 것. 이로 인해 쿠틔르적 란제리 컬렉션으로 화제를 뿌렸던 갈리아노는 만개한 장미꽃처럼 생동감 넘치고 도발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쿠틔르 컬렉션으로 또다시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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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니 프리베

촛불 아래, 그리고 달빛 아래에 선 여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던가. 알마니 프리베는 이번 시즌 ‘꿈꾸는 달에 대한 단상’을 테마로 고급스런 이브닝 룩과 비대칭의 볼 가운, 모노톤에 광택이 나는 소재의 팬츠 수트를 선보였다. 평생의 권위를 중시해온 알마니는 2001년 컬렉션에서 선보였던 오딧세이 유니폼에 감각적인 터치를 살짝 가미했다. 반짝이는 은빛 구슬과 페일 메탈릭 핑크, 그린, 일렉트릭 블루 등의 컬러 팔레트가 은은한 달빛의 움직임을 연상시켰고 반달 모양의 디테일이 하이텍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었다.


글 하은선 기자·사진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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