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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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영목사의 몽골 체험기 (24)몽골서 추앙받는 이태준열사

2009-12-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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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 주치의로 신임 ‘몽골의 슈바이처’

대의(大義)냐 소리(小利)냐 나라를 위함인가 일신(一身)의 영달(榮達)을 위함인가 정의(正義)냐 이익(利益)이냐 진정한 사나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품음직한 질문일 것이다. 작은 이익을 생각하면 큰일을 할 수 없다(見小利則大事不成)고 누가 말했나 진정한 사나이는 대의를 추구할 것이고 소인배는 작은 이익을 탐할 것이다. 이미 꺼져 버린 조국의 등불을 다시 지피기 위하여 동토의 몽골 객지에서 의로운 투쟁을 하다가 고혼(孤魂)이 되신 이태준선생을 생각하며 무거운 상념에 빠진다. 당시로서는 서양의 신학문이던 의전(醫專)을 졸업했으니 그의 인생은 얼마든지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조국을 위하여 죽을 것인가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하여 메스를 잡고 눌러 앉을 것인가 어찌 깊은 고뇌가 없었을까 그러나 그는 대의를 추구하기로 굳게 작정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그 한 몸 불사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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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열사 추모비

몽골인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 이태준 열사는 당시 몽골 국민의 70~80%가 감염되어 있던 망국(亡國)의 병 성병(性病)을 현대적인 의술로 퇴치시키면서 헌신적인 봉사를 했던 의사이다. 이미 몽골인들에게「몽골의 슈바이처」라는 말을 듣고 있었던 터였다. 이로 인해 몽골 황제의 어의(御醫)가 되었고 이런 저런 이유로 그 공로를 인정해서 1919년 7월 몽골정부는 그에게 국가 최고 훈장을 수여했으며 그 뜻을 기려 울란바타르 시내에서도 성지에 속하는 곳에 이태준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이태준, 그는 누구인가 이태준(李泰俊) 열사는 일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1년 세브란스 의학전문(연세대 의대의 전신)을 졸업해 의사가 된다. 청년 이태준의 운명을 영웅의 운명으로 바꿔 놓은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으니 아직 의학도이던 1910년 고문 후유증으로 세브란스에 입원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다. 도산을 치료하면서 민족애(民族愛)에 대해서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비밀학생 조직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한다. 도산이 이태준에게 민족이라는 큰 산을 보게 한 인물이라면 사촌처남인 독립운동가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1881~1950.12.10)은 청년 태준에게 그 큰 산을 오르게 한 선생이다.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辛亥)혁명이 일어나자 크게 감동을 받은 이태준은 1912년 중국으로 망명, 남경의 기독회의원에서 인술을 펼치다가 만주를 거쳐 1914년 울란바토르까지 가게 되니 그야말로 진정한 대한의 풍운아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열망으로 가득찬 그에게 망명과 몽골 행(行)을 권한 이는 고아에서 시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까지 지낸 그야말로 입지전적인우사이다.

김규식, 그는 누구인가 그는 한국으로 파송된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집에서 기독교교육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하여프린스턴 대학원을 졸업하고귀국하여 새문안교회의 장로가 되고 경성 연희전문 교수 등을 역임한 미국 박사 출신이다. 1913년 중국으로 독립 운동 차 망명,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이 되기까지 그야말로 독립을 위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인생을 보낸 분이시다. 그 후 8,15광복 후 귀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인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김규식 선생은 이태준에게 몽골에 독립군을 양성하는 군관학교를 설립할 기반을 마련하라는 대명을 내린다.
이리하여 사촌 처남이자 골수 독립운동가인 우사 때문에 몽골 땅에 들어 와 있던그는 일본과 맞서 싸우는 몽골인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

이태준은 동의의국(同義醫局)이란 이름의 병원을 세우고 몽골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하여 그 망국지병을 완전히 퇴치시켰으니 그는 몽골에서 신의(神醫)로 추앙받을 만큼 큰 신망과 존경을 받게 된다. 성병같은 질병조차도 라마불교의 승려들이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함으로서고치겠다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산부처인 활불(活佛)로 통하는 도통한 승려들의 불력(佛力)에도 치료는커녕 고름만 줄줄 더 흘러나오는 상황에서 이박사의 신식 의술은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기적의 연속이었으니 몽골 황제의 주치의가 되는 것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다.

몽골의 최고 훈장을 받을 정도로 그는 몽골국의 신임을 받았고 그런 신임은 그로 하여금 독립운동을 원활하게 했으니 그의 병원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줄이었고 고단한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요 안식처가 된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은 그렇게 많은 국민들이 성병에 감염되어야 했을까 일설에 의하면 일제(日帝)와 러시아 백군(白軍)이 몽골을 망하게 하려고 그 병을 일부러 퍼뜨렸다는 것이다. 현재 몽골의 수도 정 중앙 수흐바타르 광장에 정부종합청사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 건물을 건축한 자들이 바로 일제이다. 일본은 조선을 집어 삼키고 중국도 먹으려고 하더니 아예 내친김에 몽골도 삼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못된 의도에서 몽골 총독부 건물을 마련한 것이다. 게다가 러
시아의 백군도 몽골을 먹으려고 껄떡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나라를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한 몽골인들은 러시아 혁명군의 원조를 받아 중국군과 활불(活佛) 정부군(백군)을 맞서 열심히 투쟁했고 결국 1921년 수도를 점령하게 되는데, 몽골은 활불 정부군으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7월 11일>을 지금도 독립 기념일로 기념한다. 그 기념제가 바로 나담축제이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면 당시 러시아의 형편을 조금은 알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좀 쉽게 말하면 이렇다. 1917년 러시아의 황제를 싫어하는 볼세비키 공산당 혁명군을 적군이라고 하고 황제를 지지하는 세력을 백군이라고 하는데 적군이 혁명거사를 성공시키자 백군은 패주하여 결국 몽골 땅으로 침입하여 활불 정권을 수립한다. 그런데 몽골은 이 백군을 싫어했다. 한편 일본
은 이미 내몽골을 침략하여 지배했고 외몽골까지 먹으려고 백군과 손을 잡을 것이다.

한편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이태준은 이미 일군의 레이다 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태준 열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조성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한편 헝거리 출신 폭탄제조 기술자 마자르를 섭외하여 항일운동에 쓸 무기를 만들게 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니 일제가 어찌 그냥 둘 수 있으랴. 그러니까 이태준이 몽골로 간 것은 1914년이었고 1921년 일본군에 의해 피살당하기 전까지 7년 동안을몽골에서 활동했다. 이 열사는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거점으로 러시아, 중국 등을 무대로 활동 하던 중 일본군 장교에 체포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백군에게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 때 이 열사의 나이는 38세였다. 오호 통재라!

이에 앞서 몽골의 기마군단은 잠조차 서서 자는 말을 훈련시켜 풀숲에 눕게 만들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굽에 옷감으로 신발을 신기는 등 치밀한 준비를 거쳐 기습작전으로 우리 독립군의 청산리 전투에 버금가는 전투를 벌여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 한 바 있다. 그 전투에서 패한 반작용으로 독이 오른 일본은 몽골군을 공격하기 위한 양면 작전에 들어가는데 1921년 백계 러시아 장군 운게른수테른베르그의 부대와 일본군의 연합세력이 울란바토르의 몽골 항일부대 세력을 급습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열사는 체포되었으니 조국의 큰
별 하나가 떨어진 것이다. 이태준 열사는 1920년대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긴 의열단 소속이었다. 의혈단이라고도 부르던 의열단은 1919년 11월 김원봉이 만주 길림에서 12명의 동지와 함께 서로 혈맹으로 의열 투쟁을 선언함으로써 발족됐다.

의열단의 정신은 단재 신채호가 기초한 의열단 항일선언문 ‘조선혁명선언’에 잘 나타나 있으니... 강도 일본은 우리의 국호를 없애고 우리의 국권을 빼앗으며 우리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시작되는 이 선언문은 일제침략의 실상을 폭로하며 이같은 잔악한 일제를 한반도로부터 영원히 몰아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으로 맞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강력한 군사력만이 조선의 독립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의열단의 각성은 외교를 통한 국권회복을 시도했던 고종황제의 노력이 좌절된 것을 계기로 시작된 것이다.

우리 정부에서는 1980년 광복절에야 겨우 건국공로포상을 수여해 그의 넋을 위로할 수 있었고 울란바토르에서 처형됐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유해는 현재까지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 진정한 영웅의 최후인가보다. 한편 몽골 정부는 그의 유해를 찾는 데 포상금을 걸어 놓고 있으니 참으로 당연하면서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차피 한번 살다가 죽는 인생인데 이태준 선생, 당신의 삶은 참으로 고상하고 아름답고 의롭습니다.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비. 이태준 열사 기념공원 건립은 90년대 중반 몽골에서 활동을 펼치던 연세대 의대 의료봉사단이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시작됐다. 200년 3월 몽골정부가 2,000여평의 부지를 제공하고 연세대에서 비용을 대어 같은 해 7월 8일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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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을 읽어보고 있는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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