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복음 이야기 - 어머니의 죽음, 그 후

2009-10-2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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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오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외국에서 단 한 통의 전화로 듣는 부모님의 부음은 말로 다 못할 큰 충격이었다. 순간 가슴이 막 뛰는데 한참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큰형님 집이 있는 고향까지 단숨에 내달아 들른 병원 영안실. 어머니를 냉동실에서 갓 나온 시신으로 만났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몸을 떠나면 이렇게 금세 차가워지는구나, 차가운 냉동실 안에서도 춥단 말 한마디 못하시는구나….

온기 없는 어머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꼭꼭 어루만지며 때늦은 하직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평소 나와 통화할 때마다 “너한테 미안하다.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너 밥은 잘 묵고 지내냐”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하시냐고, 밖에 나와 있는 자식이 어머니께 죄송하지 왜 어머니가 그런 말 하시냐고 핀잔을 드린 적도 많았다.

그 마음을 지금 나로선 다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니구나, 진심으로 저렇게 말씀하시는구나 느낄 때마다 무척 죄송했다. 끝내 그 마음을 푸근히 풀어드리지 못한 채 먼 길을 떠나보내고 말았다.


77세를 일기로 소천하신 어머니는 10년쯤 신앙생활을 하셨다. 욕실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다치시고는 “아들이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어야지” 결심하시고 이내 장롱 위의 ‘삼신할머니’ 신주단지를 쓰레기통에 내던져버리셨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하며 다시 한 번 죄의 삯을 치른다는 게 얼마나 냉정하고 무지막지한 현실인지 실감했다. 그 영혼은 천국으로 가셨지만 어머니의 몸에는 영락없이 타락한 첫 사람 아담의 족쇄가 굳게 채워져 있었다. 태고적 창세기는 시치미 딱 떼고 오늘도 버젓이 진행중이다.

구도자로 이리저리 방황할 때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이 묵상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시체의 내부를 속속들이 찍어놓은 희귀한 칼라 사진들을 보고 나서는 그 묵상이 더 깊어졌다. 절개된 피부 아래 드러난 뒷목 언저리의 온갖 신경조직과 혈관이 떠올라 한때는 밥맛도 잃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고독하고 허무해 보였다. 죽음이 끝이라면 육체가 그토록 정교하게 지어진 이유는 또 무엇인가. 당시 내 속에 끊이지 않던 물음이다.

육체의 죽음 후에도 당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 육체에 깃든 생명의 갖가지 기능과 조직은 죽고 나서도 거짓말처럼 그대로 작동한다. 차원을 달리 할 뿐 모든 사람은 사실 결코 죽지 않는다. 죽어도 영원히 죽지 않는 것, 이것이 죽음의 신비다.

당신이 죽은 뒤 다시 눈을 뜰 때 영원을 보낼 처소는 딱 두 군데다. 캄캄한 지옥, 아니면 눈부신 천국이다. 공연한 엄포성 경고도 아니고 해묵은 종교적 폭력은 더더욱 아니다. 당신의 힘으로 지구의 24시간 자전을 한 순간도 정지시킬 수 없는 것과 같은 불변의 진리다. 이 땅에 태어나 처음 본 세상을 당신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사후 세계도 때가 되면 당신 앞에 쑥 드러날 뿐 당신의 양해나 동의를 미리 구하지 않는다.

사후 세계의 존재는 이미 정해져 있고 변경치 못한다. 애써 심판과 지옥의 두려움을 지우려 해봐야 소용없다. 단지 어떤 내세를 맞을지는 이 땅에서 바꿀 수 있다. 성경에 그 빛과 어둠을 가르는 ‘스위치’가 있다. 그냥 덧없이 까먹기에는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이 땅의 하루하루가 너무 아깝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안환균 <남가주사랑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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