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식에 ‘아메리칸 컬처’ 양념 얹어

2009-10-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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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의 코리언 아메리칸 푸드 지도를 만든다’ 데비 리

‘개나리’ 수석 셰프… TV 요리경연서 한식메뉴로 탑 3 화제

참 긴 시간을 돌아 여기까지 왔다.


애리조나 소도시에서 보낸 유년시절 내내 까만 머리, 까만 눈동자를 가진 이 꼬마 숙녀에게 ‘남과 다르다’는 이질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가슴 한구석 상처로 남았던 듯 싶다.

그러다 한참 예민한 사춘기 시절, 한인들도 적잖은 캘리포니아하고도 오렌지카운티로 전학했지만 어느새 ‘바나나’가 돼버려 오히려 백인 친구들과 노는게 더 편해져 버린 자신을 발견했단다. 그렇다고 한인 친구들과 안 어울리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난생 처음 보는 또래 한인 친구들이 왠지 서먹하고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다.

이 고단하고 혼란스럽던 시절, 그녀에게 가장 큰 위안이 된 것은 남자 친구도, 파티도, 샤핑도 아닌 바로 외할머니에게서 배우는 요리였다.

그녀는 LA 한인타운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 일주일이면 2~3번씩 놀러가 어깨너머로 할머니에게서 한국요리를 배웠다. 전혀 한국말을 할 줄도,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할머니가 만들어 주는 김치찌개와 갈비찜, 빈대떡은 그녀에게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큰 기쁨과 위로를 선사했다. 아마도 그녀에게 할머니의 손맛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안도와 평화를 가져다 주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시절엔 몰랐다. 그 할머니의 손맛이 그녀를 거쳐 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리라고는. 그리고 그녀에겐 살아가는 또 다른 용기를 주게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데비 리(40). 현재 직함은 한식의 세계화를 이야기할 때 단골로 거론되는 컬버 시티 소재 ‘개나리’ 레스토랑 수석 셰프다. 그러나 그녀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푸드 네트워크’(Food Network)의 인기 프로그램 ‘더 넥스트 푸드 네트워크 스타’(The Next Food Network Star)다. 지난 8월 이 프로에 출연한 그녀는 전국에서 수 천명의 경쟁률을 물리치고 올라온 10명의 출연진들과 진검 승부를 펼쳐 7주간 서바이벌, ‘최종 탑 3’에 등극하는 영광을 누렸다. 방영 기간동안 열혈 팬들을 이끌고 다녔던 셰프 데비의 달콤 쌉싸름한 요리 인생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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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 소스를 얹은 은대구 구이

‘더 넥스트 푸드 네트워크 스타’ 탑 3 오른 데비 리 셰프
“방송통해 한식 세계화 자신감 코리언 아메리칸 정체성 확인”

#코리언 아메리칸으로 사는 법  

그러나 무엇보다 방송을 통해 그녀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한국 음식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게 한국 음식은 한국 사람들만 먹는 메뉴였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가 만든 한식이 공개적으로 그것도 스타 셰프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부터 용기가 생겼습니다. 한식이 세계인들의 입맛을 공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죠.”

그녀가 얻은 것은 음식에 대한 자신감 뿐 아니었다. 방송 내내, 그리고 방송이 끝난 후에도 그녀에게는 팬레터가 쏟아졌다. ‘당신이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워요’라는 평범한(?) 내용에서부터 ‘당신을 보고 소수민족이지만 나 역시 잘 할 수 있다는 인생의 자신감을 얻었다’는 감동적인 내용에 이르기까지 데비는 자신의 요리가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는 방송을 통해 그녀를 오랫동안 짓눌러 왔던 정체성의 혼란을 걷어내고 자신이 코리언 아메리칸으로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명쾌한 해답과 목적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살면서 내내 머리 싸매고 정체성이라는 걸 고민하진 않았지만 한인은 물론 아시안조차 없는 소도시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다시 한인과 동양인이 넘쳐 났지만 그 곳에서도 섞이지 못하며 힘들었던 사춘기를 거치면서 코리언 아메리칸에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힘겹고 고단했던 방송 7주를 마치면서 전 명확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자신감이죠. 제가 코리언 아메리칸임이, 제가 셰프임이, 그것도 코리언 푸드를 미국 사회에 소개하는 셰프임이 자랑스럽고 무엇보다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이젠 제게 생겼습니다.

#내 요리의 스승은 외할머니

할머니에게 요리를 배우는 것이 가장 행복했던 그녀이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 시절부터 셰프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다. 그녀는 USC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정치학도였다. 학사학위는 정치학이지만 그녀가 대학 신입생 시절엔 연기 전공이었다고.

“연기 전공을 하는데 이건 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더라고요.(웃음) 할리웃이 있는 곳답게 아주 어려서부터 연기 공부를 했거나 이미 연기를 하는 친구들이 태반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꿨죠.

대학 졸업 후 방송국에서 인턴 기자로 일하기도 했고, 라디오 방송국 광고국에서도 일했지만 운명은 피할 수 없는 법. 먼길을 돌고 돌아 그녀 나이 스물 여섯에, 요리 학교에 입문 한다. 2년 코스였는데 지도교수는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뛰어난 실력에 감탄, ‘차라리 현장에서 뛰라’고 조언했다. 그래서 그녀는 샌프란시스코 유명 식당에 보조 요리사로 취직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셰프 생활은 그녀의 적성에 딱 이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 불러 음식 만들어 먹이기 좋아하던 마음씨 착하고 사근사근한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 내는 음식을 앞에 놓고 행복해 하는 이들을 보면서 행복을 얻었다. 그 뒤 다시 LA로 돌아 온 그녀는 웨스트 할리웃과 베벌리힐즈 유명 식당 등에서 일하면서 요리 경력을 차근차근 쌓아갔고 자신감도 함께 쌓아갔다. 그러다 2000년부터는 케이터링과 레스토랑 컨설턴트 회사를 운영해, LA인근 유명 식당 오픈에 참여하는 등 차근차근 탄탄한 요리 경력을 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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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에 방송된 ‘푸드 네트워크 스타’에서 심사위원으로부터 준준결승 진출이 확정됐음을 통보 받은 뒤 즐거워하는 데비(위). 데비가 본선 진출자들인 동료들과 함께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했다.


<글 이주현 기자·사진 개나리 레스토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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