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 침묵이 주는 자유

2009-10-1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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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섰고, 그 길을 따라 한껏 피어오른 새벽안개가 어물어물 몸을 열어 마지못해 길을 터준다. 그날 새벽이 갓 깨어나자, 들깬 잠 비비며 1번 하이웨이의 북쪽으로 눈을 주고 그리 바쁠 것 없는 길을 나선 참이다.

이윽고 해는 솟고 그때까지 길섶에서 꾸물대던 한 무리의 안개가, 후다닥 언덕배기를 기어올라 산자락에서 흩어진다.

길을 함께 따라나선 바다가 산굽이를 휘돌 때마다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숨었다 했다. 힐끗힐끗 바다가 보일 때면, 한 가득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 비늘로 반짝이는 바다는 역동적인 생명력으로 꿈틀거린다. 차창을 여니 여무는 가을의 청량한 바람 냄새가 좋다.


하찮은 시시비비마저 추스르지 못하고 여태, 살아 꼼질대는 야성적인 충동, 대책 없이 솟는 그 거친 마음머리에 걸려 넘어질 때면, 가차 없이 길을 나서고는 했다.

30여 년 전 그때도 이맘때였지 아마. 하늬바람에 들판의 곡식이 모질어질 즈음, 마음의 병통이 도져 무정한 시간을 바랑에 담아지고 한가한 만행 중이었다. 남도 해남 땅을 딛기 전, 수석 채집을 위해 잠시, 어느 작은 어촌의 해변에서 어둑새벽 댓바람에 돌들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한참을 지나, 끊어질 듯한 허리를 들고 사방으로 눈을 주욱 펴니, 멀지 않은 곳의 갯바위 위에 뜻밖에도 등 굽은 노장스님 한 분이, 해맞이로 가부좌를 틀어잡고 있는 그림이 들어왔다.

슬며시 돌 잡는 일을 거두고 갯바위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에 이르러 기척을 주지는 않았지만 분명, 달라진 운기를 감지했을 터인데도, 스님께서 코끝에 걸어둔 눈길은 한 터럭만큼의 미동도 없었다. 스님의 등 뒤에 저 만큼 반가부좌나마 느슨하게 자리를 잡았다.

묘한 긴장이 혈맥을 타고 흘렀다. 엄정한 위의가 뿜어내는 고고한 아우라의 파장이 오감에 와 닿았다. 거기엔 오래전 온갖 사바의 욕념과 시비가, 피와 살이, 휘발성을 지닌 인간의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증발해 버린 듯, 메말라 푸석한 고목의 등걸이 박혀있었다.

얼마나 놓아야 저리될까. 어쩌면 죽고 죽어 또 죽고 죽어 고사목으로 하얗게 말라죽어, 이제 더는 죽으려야 죽을 수도 없는 고갱이만 남은 형해 앞에서 그만, 울컥 목젖이 솟아올랐다.

스님께서는 지금 어디쯤에 있을까. 시공의 속박을 벗어나 투명하고 명료한 각성으로 의식의 세계를 한없이 넓혀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의식의 임계마저 초탈하면 바로 해방이다. 나와 우주의 완전한 해체인 동시에 합일. 그것은 ‘대자유’다.


두어 시간이 찰나로 사라졌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개구즉착(開口卽錯). 오롯한 마음 한 입 벙긋하면 곧장 금이 간다고 했다. 침묵 속에서 은밀한 묵시의 내통이 주는 법열만이 있었다. 침묵의 소리는 침묵만이 들을 수 있다.

침묵은 때로 세상의 잡다한 장애로부터 나를 해방시키는 은총이 된다. 침묵이 주는 ‘자유’다.

스님의 낡고 굽은 몸이 꽤나 결 사나운 바닷바람을 버티며 일어섰다. 형형한, 그리고 따스한 스님의 눈빛이 엉거주춤한 나를 한 순간 빠르게 훑고 떠났을 뿐이다.

샌타바바라를 지나는 길이 찬찬하고 참으로 참하다.


박재욱 (나란타 불교아카데미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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