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화장·봉평장엔 정감어린 삶의 모습

2009-10-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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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 국토 종단기 <25> 평창에서 장평까지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의 한국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곽춘식씨는 농장을 하면서 초가집 식품이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순수자연 청국장을 비롯한 무방부제, 무색소, 무화학 첨가물인 자연 발효식품을 주로 생산한다고 했다. 소비자로부터 품질을 인정을 받게 되면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판매는 문제가 없단다. 사람들이 건강과 여가 선용에 관심을 가질 만큼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는 얘기다.

농가에선 웰빙 농산물 생산판매로 분주
길가의 효자비 보며 ‘지성이면 감천’생각


저녁에 곽 사장과 만나기로 약속하고 걸음을 재촉하는데, 길가에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위홍연 효자비다. 아버지가 병이 나자 동해바다에서 연어를 구해오던 중, 대관령에서 호랑이를 만나 그 등을 얻어 타고 달려와 아버지 병을 고쳤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조금 더 걷다보니 최한성 효자비가 나온다. 병든 어머니가 생선을 먹고 싶어 하는지라, 추운 강가를 헤매는데 효성에 감동했던지 잉어 두 마리가 얼음 위로 뛰어올라 이를 가져 와 병을 고쳤다는 사연이다.

효자비 앞에서 아이들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라 생각을 하면서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떠 올릴 것이다. 전북 임실지역을 지날 때 보았던 충렬문과 충혼탑, 충북 제천지방에 있던 공덕비와 열사들의 묘비, 그리고 효자비. 이런 것들이 후손들에게 뿌리를 심어주기 위한 노력임을 우리 아이들이 모를 리가 없다.

언젠가 국가고시에 국사과목을 넣어야 하느니 마느니 논란이 되더니만, 최근 국비 유학생 시험에 국사 시험을 폐지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연어처럼 본향을 잊지 않게 하려면 뿌리가 단단해야 한다. 정책을 세우는 사람들이 뿌리 교육을 경시하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배낭을 내려 아침에 산 가래떡을 꺼내먹었다. 오면서 하나씩 먹었더니 어느새 반으로 줄었다. 짐이 줄어들면 그만큼 걷기가 쉬워진다. 가래떡 반 봉지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느냐고 반문할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매일 걷다보니 무게에 민감해 진다. 배낭을 꾸릴 때 치약도 작은 것으로, 비상식량으로 준비한 ‘스니커’도 버리고 꼭 필요한 것만 넣었지만 그래도 무겁다. 많이 가질수록 족쇄가 되고, 가진 게 적을수록 삶이 가볍고 홀가분하다는 것을, 배낭을 메고 걸으면서 깨닫고 있다.

“전국 최고의 명품! 저 농약 웰빙고추 대화초!”란 큰 입갑판이 서있다. 대화마을에 도착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대화 장터가 있는 곳이다. ‘우물집 대화 칼국수집’에 들어갔다. 날씨가 쌀쌀하니 아랫목으로 앉으라며 자리를 마련해 준다. 감자칼국수가 맛있다. 지금도 대화 장이 열리느냐고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5일마다 장이 서고 봉평장도 열린다고 했다. 장날에 맞춰 왔으면 더 좋을 뻔했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은 1920년대 봉평에서 이곳 대화까지 80리에 걸친 메밀꽃 핀 달밤의 산길이다. 소설 속에서 허생원 일행이 봉평장의 전을 거두고 대화장을 향해 달빛 아래 걸었던 그 길을, 지금부터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허생원처럼 나귀도 타지 않고 밤길이 아닌 낮 동안에 혼자 걸어가는 길이지만, 사방에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걷기로 했다.

넓은 도로를 걸어가면서, “길이 좁은 탓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고,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는 소설 속의 풍경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작가 이효석이 묘사한 다음의 한 구절을 함께 떠 올린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사귀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던짓골 사거리를 지나 재산재에 이르렀다. 산자락에서 할아버지가 무엇을 캐고 있기에 물었더니 야생 뽕나무뿌리를 캐는 중인데, 당뇨에 특효라고 한다.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 장평에 도착했다. 개울을 건널 때는 허생원이 어디쯤에서 넘어져 동이에게 업혔을까 상상도 하면서 즐겁게 걸었다. 봉평은 여기서 멀지 않다. 장평장 여관에 숙소를 정하고 곽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함께 이효석 전시관을 찾아갈 예정이다.

HSPACE=5
강원도에는 아직도 5일마다 장이 서는 곳이 제법 있다. 여기저기서 가격 흥정이 벌어지고, 입맛을 당기는 먹거리들이 즐비한 이곳은 서민들의 삶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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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어머니의 밥상에 생선을 올리기 위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강변을 뒤지다 그 효심 덕분에 잉어를 얻었다는 최한성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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