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메밀의 고장에 왔으니… 메밀 한입 ‘꿀꺽’

2009-09-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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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 국토 종단기 <23> 강원도 평창

시장골목 사람들 “이효석 덕분에 먹고살지”
물 맑은 강가 걸으며 소설 속 장꾼들 생각

새벽에 여관을 나왔다. 여관에 인터넷이 없으니 PC방을 찾아가 신문사에 원고를 보내야만 한다. 날씨는 맑고, 산수가 좋은 곳이라선지 공기가 상큼하다.

여관 뒤쪽으로 나오니 바로 시장골목이다. 시장 입구에서 할머니가 메밀전을 부치고 있다. 부침개를 만들어내는 할머니의 솜씨가 그만이다. 철판 위로 피어오르는 기름 냄새가 구수하다. ‘전병-평창 원조 전문점’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고 ‘메밀 부치기 3장에 2,000원’이라고 빨강색 글씨로 삐뚤빼뚤 쓰여 있다.
부침개 3장을 주문했다. 어떤 아주머니가 가게 안으로 들어오더니 할머니 옆자리에 앉아 메밀전병을 부치기 시작한다. 할머니에게 며느리냐고 물었더니 딸이라고 한다. 고부 사이와 모녀 사이는 분위기가 다르다.


따끈따끈한 부침개를 간장에 찍어 출출하던 차에 맛있게 먹고, 3개를 더 주문했다. 할머니가 빙긋이 웃더니 한 개를 더 올려 4개를 담아주신다.

새벽에 배낭을 짊어지고 나선 내 모습이 타관사람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던지, 전병을 부치던 아주머니가 이효석이란 분을 아느냐고 묻는다. 그 분이 누구냐고 짐짓 모른 체 하자, 아니 평창에 오신 분이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씨를 모르면 되겠느냐고 정색을 하더니, 이효석을 맞췄다면 부침개 값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며, 농을 친다. 그런 다음 “우리가 그 양반 덕택에 이렇게 먹고사는 게 아니냐”고 한 마디 덧붙인다.

한 작가의 힘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새삼스럽게 문학의 힘을 확인하게 된다. 어떤 작가로 인해 한 지역이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이효석 작가처럼 사후에도 변함없이 고향에서 칭송을 받고 있는 것은 자랑스럽고 부러운 일이다.

시 ‘사평역에서’의 ‘사평역’이나 소설 ‘무진기행’의 ‘무진’처럼, 작품 속에만 있고 실재하지 않는 곳도 있지만, 이곳 평창처럼 이효석 때문에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었다고 주민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곳도 있다. 작가의 이름이 기억되고 안 되고는 다음의 일이다.

3년 전, 필자는 ‘쌍코뺑이를 아시나요’라는 산문집을 한 권 펴냈다. 이 책이 나온 다음 몇 사람이 우리 시골 마을을 다녀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쌍코뺑이’는 내 고향 동네 뒷산에 있는 자그마한 언덕 이름인데, 어디쯤에 쌍코뺑이가 있느냐고 묻더란다. “살다 보니께 참, 별일도 다 있더랑께. 자네 이름을 들먹이며 사람들이 쌍코뺑이를 찾아왔더라고!”하며 생뚱해 하시던 아재의 모습이 생각난다. 사실은 나도 좀 놀랐다. 그 시골 마을을 물어 물어서 쌍코뺑이를 찾아오다니!

시장 뒷골목을 빠져 나가면서 보니 “경원이네 메밀집” “원조 메밀국수” “메밀 꽃 술” 등. 시장 통이 온통 메밀음식으로 가득하다. 평창이 메밀의 본고장인 줄 이제 알겠다. 소설 한 편이 한 지역민을 먹여 살리는데 이렇게까지 도움이 될 줄은 작가 자신도 몰랐을 터이다.

PC방을 물어서 찾아갔다. 청소년들이 눈을 반짝이며 게임을 하고 있다. 밤을 새우고 있나보다. 몇 아이들은 의자에 엎드려 자고 있다. 무엇엔가 몰두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저런 과정을 거쳐 컴퓨터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부모의 입장에선 걱정도 되겠지만 지나친 걱정은 기우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니까.


원고를 써 보내고 난 다음, 시장 골목으로 다시 가 찰떡 한 봉지를 샀다. 배낭에 넣어 짊어지니 제법 묵직하다. 시골길을 걷다보면 점심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만약을 대비하는 게 상책이다.

강가를 걷는다. 물이 맑다. 송어가 이 지역 특산물인 이유를 알겠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운치가 있다. 다리 앞 평창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Get Your Time Happy 700 평창”이라는 입간판이 서있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해발 700미터 정도가 사람 살기에 적합한데, 평창이 바로 그 지역에 해당한다는 의미란다.

오늘은 장평까지 갈 예정이다. 장평 가는 도중 대화를 지나게 된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은 장평 부근에 있는 봉평, 그 봉평장이 파하고 다음날 열리는 대화장을 향해 나귀에 짐을 싣고 밤길을 걸어가는 장꾼들의 얘기가 중심이 된다.

목재소에 나무가 산처럼 쌓여 있다. 산이 많은 지역이니 그 산천에서 나오는 물산도 다른 지방과는 다를 성싶다.

‘평창 산삼나라, 심마니 최복규’라는 푯말이 눈에 띈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깊은 산중을 헤매며 산삼을 캐내 살아가는 심마니는 어떤 사람일까. 전화를 걸었다.


<정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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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은 한국 문학의 걸작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고향이다. 그래서 이곳에 메밀꽃이 피면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고향의 맛과 멋을 즐긴다. 만개한 메밀꽃. <평창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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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은 산이 깊고, 물이 맑다. 그래서 자연을 그대로 담은 갖가지 산나물 등 바깥사람들의 입맛을 유혹하는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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