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껄껄 웃는 김삿갓 동상이 날 반기네

2009-09-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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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보 국토 종단기 <22> 강원도 평창 가는 길

국토종단 기사 읽고 온 초면의 부부와 함께
좁은 산길 걸으며 통일 생각·옛 추억 젖어

서울서 내 국토종단 기사를 보고 달려 온 이상엽씨 부부가 타고 왔던 차를 근처 농가에 세워놓고 세 사람이 함께 걷는다. 이상엽씨는 공인회계사이고, 그의 아내 김정희씨는 대학 교수다. 신문에서 해외 동포가 통일기원 국토종단을 한다는 기사를 보고 함께 걷고 싶었다는, 오늘 처음 만난 분들이다.


전화로 이메일로 응원해 주시는 분들, 먼 길을 달려와 이렇게 함께 걸어주는 분들, 여러 가지 모습으로 성원해 주신 많은 분들. 내가 걷는 이 길이, 그 분들과 함께 걷는 길임을 나는 안다.

걸어가면서 통일의 당위성, 전망, 통일운동의 방법 등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막대한 분단 비용은 물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불필요한 대결과 모순의 상당부분이 조국분단에 기인하고 있다는 현실인식. 통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이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정부의 통일정책, 통일에 있어서의 시민단체의 역할, 자라나는 세대에게 통일의 당위와 비전을 심어주는 일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었다. ‘문화의 힘’ ‘시민의 힘’이 통일운동의 구심점이 될 것이라는 이 선생의 의견에 상당부분 공감했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있다면, 가능할 것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샛길 옆에 작은 묘가 보인다. 애기 묘다. 무덤 위에 돌멩이가 쌓여 있다. 중학 일 학년 때 3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꽤 높은 산을 혼자 넘어 다녔다. 부근에서 읍내로 중학을 다녔던 아이는 나 혼자 뿐이었으니까. 좁은 산길을 가노라면 애기 무덤과 처녀무덤이 군데군데 있었다.

아기가 죽으면 옹기에 담아 길가에 묻고, 처녀가 죽어도 길가에 묻는다고 했다.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돌멩이나 솔가지를 꺾어 무덤 위에 던졌다. 무덤 위는 언제 보아도 돌멩이나 솔개비가 수북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저녁, 학교가 늦게 끝나 산길을 혼자 넘었다. 애기무덤 근처를 지나는데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처녀무덤 부근을 지나자 저벅저벅 날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이 쭈삣 섰다. 산길을 냅다 뛰기 시작했다. 발자국 소리는 뛸수록 더욱 가깝게 쫓아왔다. 물 먹은 황토 길은 미끄러웠고, 나는 돌 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한참을 끙끙거리다 다시 일어나 절룩거리며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거그 오냐-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불빛이 보였다. 호야 등을 들고 밤길을 마중 나온 어머니였다. 집에 와 보니 옷은 흙 범벅이 되었지만. 다행히 허리에 멘 책보는 그대로 있었다.

그 후로도 그 산을 넘어 학교에 다녔다. 비 오는 날, 다시 그 길을 가는 게 무섭고 싫었지만, 그 길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무섭더라도 그 일을 하다보면, 무서움이 없어진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걷기에 제법 이력이 난 나보다 이 선생 부부가 더 잘 걷는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올라서니 인부들이 전봇대를 옮기고 있다. 아스라한 골짜기 아래 농가 한 채가 보인다. 강원도에는 외딴집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평야지대는 공동 작업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산중에서는 저마다 자기 밭 한쪽 옆에 집을 짓고 살기 때문이라 했다. 지금도 그럴까. 산을 뚫고 잘라내어 길이 만들어지면 문명의 볕이 골짜기까지 비추게 마련이다. 그 볕을 따라 사람들이 몰려든다.


원동재 마루에 이르니 ‘기분 좋은 만남, 평창’간판이 보인다. 영월과 평창 경계다. 삿갓을 쓰고 껄껄 웃는 김삿갓 동상이 서있다. 김삿갓의 묘가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있다고 했다. 영월군이 김삿갓이 살았던 곳이고, 그의 무덤이 있는 곳인지는 몰랐다.

80년 추석. 대학을 졸업하고 자그만 암자에서 공부하던 시절, 명절에 김삿갓 어른이 쓸쓸하시겠다며 옆방에서 공부하던 친구와 함께 무등산 자락의 묘를 찾아 소주 한 잔 올려드린 적이 있다. 김삿갓이 돌아가신 곳에 쓴 가묘였다. 참, 그 친구. 함께 갔던 그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최근에 들었다. 영월을 지나면서 삿갓 어른께 술 한 잔 올리지 못하고 가는 게 아쉽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비를 맞으며 이선생 부부와 얘기를 나누며 걷는다. 화제가 끝이 없다. 얘기를 하다 보니, 씹어 먹을수록 구수한 잘 굳은 찹쌀떡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창읍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굵어진다. 버섯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 선생 부부는 서울로 돌아갔다. 평창의 밤,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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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을 대표하는 동강의 백미 어라연. 평창군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과 정선군 북부를 흐르는 조양강이 만나 이뤄진 동강은 남한강 상류로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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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유적지. 김삿갓 묘소와 집터가 있는 곳으로 해마다 10월이면 문화행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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