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펄떡이는 에너지… “요리는 나의 힘”

2009-08-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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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 코르동 블루’ 선후배 3인 유쾌한 수다 엿보기

#프롤로그

30초마다 터지는 박장대소, 1분에 한번 꼴로 나오는 ‘맞아, 맞아’ 추임새, 그리고 그 사이 사이 흐뭇한 미소와 따뜻한 눈빛이 촘촘히 얽히고설켜 그 대화의 틈을 메운다. 그렇다. 연대다. 그것도 보통 연대가 아닌 바로 지금, 같은 걷고 있는 이들 만이 느낄 수 있는 동질감이랄까 동지애랄까 하는 참으로 뜨거운 연대 말이다.

동문이라는 단어가 필연적으로 부여하는 해사한 친밀감은 여느 학교 졸업생들과 다를 바 없겠지만 그들에겐 그것만으론 설명 불가능의 플러스알파가 더 존재한다.


아마도 잘 닦여진 길이 아닌 스스로 걸어가며 길을 내야 하는 험난한 여정을 선택한 이들의 동병상련이 만들어낸 골 깊은 아우라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런 씩씩한 아우라를 지닌 르 코르동 블루(Le Cordon Bleu) 출신 선후배 3명이 여름 햇살 곱게 스러져 가는 어느 오후, LA 한인타운 ‘파크 온 식스’에서 의기투합 뭉쳤다.

서울정 최정욱(31) 매니저(호텔 경영), 파크 온 식스 클레어 림(28) 셰프, LA 유명 이탈리안 레스토랑 모짜(Mozza) 엘리자베스 홍(26)씨가 어렵사리 시간을 맞춰 파트락(potluck) 파티를 준비했다. 나이도, 성별도, 입학 연도도, 그간 살아온 이력도 전혀 다른 이들이었지만 단지 르 코르동 블루 선후배라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만남은 뜨거웠고, 유쾌했고,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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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동 블루 출신 선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공도, 나이도 서로 다르지만 요리와 식당에 대한 열정만은 우열을 가르기 힘들만큼 똑같은 무게를 지녀 이들의 ‘수다’는 경쾌했지만 불꽃 튀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최정욱 매니저, 클레어 림, 엘리자베스 홍 셰프.

#그들의 수다에 매료되다

-요즘 한인 셰프들이 많이 늘고 있는 것 같아요. 피부로 느끼나요?(클레어 림, 이하 림)  

“일하다 보면 코르동 블루 출신들뿐 아니라 미 전국에 실력 있는 한인 셰프들의 이름을 자주 듣게 돼요. 제가 입학할 때만 해도 한인 학생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요즘은 클래스마다 한인 학생들 숫자가 늘고 있다고 하더군요.”(최정욱, 이하 최)


“요즘도 여학생들보다는 남학생들의 숫자가 월등히 많아요. 그리고 특히 어린 학생들일수록 힘든 커리큘럼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는 이들이 많죠. 그런데 막상 식당에서 일하면서 학교 수업이 얼마나 쉬웠는지 알겠더라고요. (웃음)”(엘리자베스 홍, 이하 홍)

-맞아요. 최근 식당 비즈니스가 인기를 얻고 스타 셰프들이 출연하면서 식당업이 젊은이들에게 각광받는 분야가 됐어요. 그런데 현장은 결코 그렇게 만만치 않잖아요?(최)

“영업시간에는 전쟁터가 따로 없죠. 아마 그래서 식당 주방 내 셰프들 간에 위계질서가 엄격할 거예요.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제대로 음식을 만들고 서브할 수 없거든요. 그렇게 바쁘고 유명한 식당에서 일한 덕분에 전 짧은 기간에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홍)

“엄청난 노동 강도를 요하는 직업이어서 사실 여성들의 진출이 여전히 많지 않은 분야이기도 하죠. 게다가 스타 셰프들이 많다곤 하지만 90%의 셰프들은 저임금과 긴 노동시간 때문에 결국 중도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는 이들도 많이 봤어요.”(림)

-그렇다면 훌륭한 셰프란 타고나는 걸까요? 아니면 만들어지는 걸까요?(홍)
“이 질문에 정답은 없겠지만 경험상 인내와 노력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불성실하고 게으르면 이 무한 경쟁이 지속되는 요리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요.”(림)

“동감입니다. 식당에서 인력채용을 하다보면 클레어씨 말이 맞다는 걸 절감하게 되죠.”(최)

-르 코르동 블루 출신이라는 게 셰프들에겐 커리어에 가산점이 되나요?(최)
“제 경우엔 학교 배경 베니핏은 없었던 것 같아요.(웃음) 식당 내에서도 정식으로 요리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실력 있는 이들도 많은데다 운영진 자체도 학교 배경보다는 실력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필드에서 어떻게 노력하고 경쟁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홍)

“그래도 시간이 갈수록 요리학교를 다닌 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근 미국도 점차 도제식으로 배운 1세대 요리사들의 시대가 가고 요리학교 출신 스타 셰프들이 늘어나면서 셰프의 꿈을 키운다면 요리학교는 가는 게 좋다고 봐요. 게다가 동문 셰프들 간 네트웍 역시 무시할 수가 없기도 하고요.”(림)

#에필로그  

그들의 대화 속엔 은빛 고등어 떼들이 헤엄쳤다. 워낙 불꽃 튀는 대화들이 오고가는 지라 그 대화 행간 물결과 함께 솟구치는 은빛 고등어 떼들이 보였다고 해도 너무 과장이다 탓하지 말길. 청춘을 걸고 나선 길, 때론 좌충우돌, 의기소침해진 적도 있었지만 식당은, 요리는 그들의 미래이며 꿈의 또 다른 이름이기에 여전히 이들은 지도 없이 걷는 이 길이 매력적이란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지도 밖으로 행군하고 있는 그들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 ‘르 코르동 블루’ 한인 선후배 3인 프로필


“요리는 연애와 같아요. 일단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게 연애인데 전 지금 요리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어요”

‘파크 온 식스’ 클레어 림 셰프

알면 알수록, 요리를 먹어보면 먹어볼수록 그녀 자체가 내뿜는 열기가 뜨겁다 못해 만지면 손데일 정도다. 13세 때 부모를 졸라 혈혈단신 도미, UCLA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의대 진학을 앞두고 있던 미래의 의학도가 어느 날 갑자기 요리에 신들린 듯 꽂혀 르 코르동 블루에 입학한다. 2006년 졸업 후 동부에서 파티 전문 프라이빗 셰프로 일하다 올 봄 ‘파크 온 식스’에 왔다. 그녀의 요리는 재료의 맛을 충분히 살리면서도 담백하고 그러면서도 정성과 열정이 담뿍 들어 있음을 한 입 베무는 순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멋지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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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어 참 고무적입니다. 세계에 한식의 깊고 오묘한 맛을 알리기 위해 전부를 걸었습니다”


‘서울정’ 최정욱 총괄 매니저

2005년 봄 서울정에 입사, 입사 5년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총괄 매니저의 자리를 꿰찬 이 불굴의 사나이는 식당에 ‘미쳐’(?) 모르긴 몰라도 하루 24시간 식당 생각만 하지 싶다.

시라큐스 대학에서 컴퓨터 엔지니어링을 전공, 잘 나가던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그는 제대로 된 한식당을 주류사회에 오픈해 보고 싶다는 꿈 하나를 부여잡고 2002년 르코르동 블루에서 호텔 경영을 전공했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시작한 일이어서 인지 그의 서비스엔 말 그대로 남다른 ‘엣지’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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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주방은 완벽한 전쟁터예요. 한시도 방심할 수 없이 긴장감이 흐르는 데 전 그 팽팽한 긴장감을 사랑합니다”


‘모짜’ 엘리자베스 홍

LA 스타 셰프 레스토랑 중 하나인 모짜에서 근무한지 햇수로 2년째. 그녀의 포지션은 샐러드 바. 모짜 레스토랑의 간판처럼 돼버린 샐러드 바를 2년차 쿡(cook)이 ‘접수’한 걸 보면 그녀의 떡잎은 알고도 남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커뮤니티 칼리지에 다니다 어려서부터 식당업을 한 어머니(박대감 제니 김대표)의 영향으로 코르동 블루에 진학했다. 인턴십으로 시작한 모짜와 함께 성장, 세계로 진출할 꿈을 꾸고 있는 그녀는 코르동 블루라는 배경보다는 요리에 대한 열정과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다부진 꿈을 꾸고 있다.


<글 이주현, 사진 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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